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2018/9/30(일)
20170512_091842.jpg (135KB, DN:1)
의식수준에 따라  


어느 대도시의 번화한 동네 어귀에 허름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서 있습니다.
그 앞을 이런저런 사람이 수도 없이 지나가지요.
그런데 그 노인을 보고 느끼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노인을 더럽고 구역질나는 존재로 여깁니다.
또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은 노인을 위협적인 존재, 사회악으로 보기 때문에 어서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존심’에 걸려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는 노인을 자존심조차 없는 사람으로 보고 경멸합니다.
나아가 부랑아를 양산하고 방치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과 요구 사항이 아주 많습니다.
반면 의식지수가 높은 사람은 관점이 확 달라집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그 노인을 위해 근처에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시설과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볼 생각을 합니다.
‘포용’ 수준이 되면 노인이 어떤 이유로 해서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또 ‘사랑’이 많은 이들은 노인을 오히려 세속으로부터 초탈한 자유인으로 봅니다.
나아가 ‘평화’의 수준에 이르면 내가 잠시 노인의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여기지요.
나와 타인의 분리감이 사라지는 겁니다.

예전에는 IQ라고 해서 지능지수로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그 후로 90년대에는 EQ라고 해서 감성지수를 높이 보았더랬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거기에서 SQ라고 해서 영성지수, 혹은 의식지수로 사람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식지수는 의식을 수치로 0에서부터 1000까지를 두고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지요.
의식의 최고의 수준부터는 깨달음-평화-기쁨-사랑-이성-포용-자발성-중용-용기, 이렇게 두고 있는데 의식지수 200인 용기가 사람에게 긍정의 힘과 부정의 힘을 사용하게 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용기 아래는 자존심-분노-욕망-두려움-슬픔-무기력-죄의식-수치심, 으로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의 의식수준은 수치심이지요.
부끄러워서 위축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

이런 표를 통해 얻는 이점은 나는 어떤 수준에 있는지 돌아보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알아야 그 다음을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의식수준, 영성지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최고의 수준인 깨달음과 평화를 구원에 두고 예수께서 그 수준의 삶을 살면서 그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세계로 끌어올리시는 것이지요.
그 빛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그 빛 덕분이지요.
그가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 수준의 삶을 만나서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빛과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삶 속에서 물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생로병사’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덕분에 또 인류가 성장하고 진보할 수 있는 동력을 얻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천 수 만년 동안 ‘생’의 문제를 해결해온 것이 과학입니다.
그리고 ‘노’, 늙음의 문제를 풀어온 것이 철학이고, 병의 문제를 만나서 발견한 것이 예술입니다.
또한 ‘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나타난 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게 찾고 구하면서 오성을 통해 과학이 발전하고, 이성을 통해 철학이 발전하고, 감성을 통해 예술이, 영성을 통해 종교의 세계가 열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삶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요.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생물학적인 생명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거기까지겠지요.
삶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온 영적인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부지런히 나의 영적인 상태, 의식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 깨어서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물음으로 요한복음은 위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서 땅의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 즉 위의 차원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땅에서 나서 땅의 차원에서 살 것인지를 묻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무기력과 죄의식, 수치심의 수준에 있으면 지금 저의 상황이 참 비참해 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억만리 타지에 나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대우받고 잘 나가던 큰 교회 목사에서 초라하게 몇 명 앉혀놓고 설교라고 하고, 양로원에서 어르신들 뒷바라지하며 밥하고 청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난하고 탓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싶고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를 바꾸어 의식의 수준을 기쁨과 사랑과 평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면 같은 상황이 180도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또 지금 내 안에서 더 큰 사랑으로 부활하고 있으니 나는 아내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 사실로 찾아다니고 알아달라고 매달리지 않아도 늘 같이 있는 것이지요.
또 시키는 대로 따라하던 목회에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 통하는 좋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피를 나눈 관계도 아닌데 이렇게 더 친밀하게 하나되어 서로 믿고 돕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나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지요.
그러니 지금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축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차원에서 살아갈 것인지’입니다.
위에서 오는 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은 관계이고 세상입니다.
완전하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의미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할 수밖에요.
경험하는 것만큼 정직하게 표현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해서 경멸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땅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과 슬픔과 무기력과 수치심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보지 못한 것을 얼버무려 거짓을 말하고 속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의식수준을 돌아보고 그것을 높이는 것이 기도요 예배요 수련입니다.

(요한복음 3장)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가까이 있는 하나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으로 비유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씨를 뿌리는 사람이지요. 농부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지만 사실은 그것이 어떻게 싹이 나고 자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스림, 섭리이고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이지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성장하고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인생은 이 자연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이겠습니다. 그 안에, 그 흐름에 나를 맡기고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저 회개하고 돌이켜 받아들이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깊은산 20180923)

#세월호 참사 1622일째 : 세월호참사 당시 음모론으로 치부되었던 ‘잠수함 충돌설’이 있습니다. 바다 위아래에서 펼쳐진 해양 군사 훈련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제기는 음모론에 불과하다며 괴담 취급을 받았습니다. 물론 충돌설을 구체적인 물증 없이 속단하여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배제할 수 있는 명백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적어도 ‘이거나 아니거나 가능성이 반반’일 수도 있으니 앞으로 대한민국 연안 바다에서 국민이 파악할 수 없는 군사 훈련을 이제 더 이상 벌이지 않도록 하면 위험스런 가능성의 절반은 예방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전면 재규명)

김흥호 선생님은 사람은 하루를 살아 하루살이라고 했습니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지요. 기쁨과 슬픔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기도 하고 쉬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하루입니다. 어제도 하루이고 내일도 하루인데 그 하루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루를 살려 지구를 방문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왔습니다. 씨앗이지요. 그렇게 가져온 씨앗을 이 세상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으면 추수할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멋진 비유 아닙니까? 오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밤에 자고 낮에 깨는 동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를 바라보고 돌보는 농부의 마음, 신비로, 자연으로 그 넉넉함과 사랑스러움으로 지켜볼 따름입니다. 내가 뿌린 씨앗은 이제 내 손을 떠나서 저절로 자라고 되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깊은산 20180924)

#세월호 참사 1623일째 :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절대적으로 우선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앞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금기와 성역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합의나 타협, 기성의 법의 판례, 관례에 규정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철저히 제대로 규명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성의 기득권들은 ‘일말의 가능성 제기’조차 ‘위험하다’며 제지하려 들고 있습니다. 위험을 저지른 자들이 국민을 위험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전면 재규명)

씨앗의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밤에 자고 낮에 깨는 동안 싹이 나고 저절로 자라는 것입니다. 농부는 수고를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저 오늘, 지금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으니 또 '나'를 믿습니다. 염려하고 근심하기보다는 '저절로' 자라는 은혜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할 일입니다. '인위'와 '자연'의 차이입니다. '인위'로 살려하기에 고통스럽습니다. 그저, '자연'으로 살면 됩니다. 변화는 각오와 결심,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일은 이것을 해야지.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 하는 결심은 백날을 해도 결심으로 그쳐집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 듯이요. 우리는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뿌려만 놓았지 싹이 나고 자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절로 일어납니다. 오늘도 고마울 뿐입니다.(#깊은산 20180925)

#세월호 참사 1624일째 : 수 백, 수 천의 국민이 반복적으로 영문도 모른 채 수장되어 왔고 제대로 된 수사와 조사의 기회도 보장받지 못한 채 방치 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4명의 희생자 분들과 피해자분들에게는 너무나 죄스럽게도 세월호참사는 어쩌면 우리 국민들에게 대형 사망 참사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을 세월호를 지켜본 수많은 국민들이 반성한다고 했습니다. 어른들 탓이라고, 기성세대의 문제라며 이름 모를 수많은 국민들이 성찰하며 노란리본을 가슴에 품고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304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들, 구조방기의 진짜 책임자들은 반성하고 처벌 받았을까요?(전면 재규명)

또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작은 것이 자라서 가장 크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은 씨앗에서 싹이 나는 것이고 알이 깨어 병아리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 작고 초라하다고 기죽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늘 그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크게 시작한다고 해서 크게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은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썩지 않으면 아프지 않으면 변화가 될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겨자씨와 같습니다. 오늘도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침에 웃으면서 일어나는 일부터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들과 정성껏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시방 내 마음의 날씨를 알아주면서 사랑함으로 내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루입니다. 그 작은 일이 곧 큰일입니다.(#깊은산 20180926)

#세월호 참사 1625일째 : 세월호참사의 원인. 그것은 배에 물이 들어차며 304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침몰의 시작, 즉 ‘침수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침수의 순간에 대해 그들은 우리 국민들을 교묘하게 속여 왔습니다. 그들이 주입한 것은 바로 ‘선(화물)이동 후침수’. 바로 과적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블랙박스 영상 복구 증거로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난 비정상적인 ‘선(빠른)경사 후침수’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세월호의 탑승객을 더 위험에 빠트린 것은 침수 지연을 하지 못한 수밀문 개방과 급경사와 동시에 발생한 급선회로 인한 세월호의 전복이었습니다.(전면 재규명)

어떤 것보다 작은 것, 그것이 사실 내가 만들어 가는 비밀한 생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 이것 가지고 어떻게? 라고 두려워하는 것, 그것을 심고 자라면서 변화되어지는 생입니다. 또 지극히 작은 그것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비입니다. 씨를 심지만 자라는 것은 맡겨야 합니다. 내가 씨앗이 자라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가다가 내 힘에 부쳐 쓰러지는 것, 하늘에 맡긴 것이 아니지요. 내 힘 의지하지 않고 그저 내 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그 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시는 분도 그분, 내 일에 장애물도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라 알 때 나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도우려고 있는 선물입니다.(#깊은산 20180927)

#세월호 참사 1626일째 : 빠른 시간에 벌어진 심각한 경사와 동시에 발생한 것이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 급선회였습니다. 급선회에 대해 그들은 ‘조타의 영역’으로만 단정하며 주요 증거들에 대한 검증과 조사 없이 대충 ‘급변침’으로 둘러댔습니다. ‘급변침’과 ‘급선회’는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왜 결정적 차이를 가지는 문제인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급변침’은 선박의 방향키에 관한 영역으로 한정되며, ‘급선회’는 주로 선박 외부의 영향에 대한 가능성을 검증하는 일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선박 침몰 원인이 자연에 의한 외력이 대부분이므로 급선회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것은 상식적인 검토입니다. 그러나 해양적폐세력의 전문 자문가들은 대형선박과 바다에 대한 상식을 잘 모르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전면 재규명)

저녁은 하루의 마감입니다. 예수께서는 밀려드는 군중들을 피해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는 그 때 가장 행복하셨을 거예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오셨으니 말입니다. 나도 내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또 행복하게 일하는 그 일이 나의 일이겠지요. 그런 것을 알아차려야 우리 삶이 그 만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은 어떠했을까요?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지만 저녁은 또 쉬고 싶어질 때입니다. 이제 이만큼 했으니 조금 물러나 있자 라는 마음이 들지요. 때론 이제 이만큼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 이만하면 되었다구요. 이제 저녁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저녁에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시지요. 바다 저쪽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녁에 그렇게 바라보고 가는 그가 예수입니다.(#깊은산 20180928)

#세월호 참사 1627일째 : 세월호참사의 원인은 ‘조타미숙 또는 정비불량, 과적과 복원력 불량’이라며 이는 절대불변 하는 진실이라고 ‘교리’를 만든 그들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바로 검경 합동수사본부와 자문단. 자문단장은 바로 중앙해양안전심판원 고위직 심판관 출신이었습니다. 자문단이 대부분 해양수산부 산하의 중앙해양안전심판원 등 산하 기관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 자문단에 의해 검찰의 공소장은 설계된 것입니다. 검찰의 공소장이 2014년 10월에 발표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해양안전심판원과 자문위원단의 특별조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복원력이 극히 불량한 이유로 세월호가 30도 기울어지면서 화물이 미끄러져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경사가 심화되어 침수가 발생한 후 침몰했다’ 이 서사적 단계가 저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소장과 특별조사보고서에 경사에 대한 시간 개념은 아예 제대로 제시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사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치하게 블랙박스는 어떤 소리가 난후 사람과 차가 날아갈 정도로 배는 급격히 돌면서 빠른 시간 안에 큰 낙차 폭으로 급경사를 일으킨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50도 이상 급격히 기울기까지 초당 4도 이상의 속도가 걸렸고 이로 인해 바로 침수가 발생, 이 순간 화물차들은 미끄러진 게 아니라 굴러가고 날아갔다’는 것이 실제 사실입니다.(전면 재규명)

우리 삶 자체가 사실은 바다 저쪽을 향해 있지요. 그냥 이쪽에 머물러 있고 싶고 안주하며 살고 싶지만 그런 삶은 죽은 삶입니다. 멈추어 있는 것은 퇴보입니다. 지금 문을 나서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순간을 마지막처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종말론이지요. 오늘 가야할 바다 저쪽,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나요?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자고 했으니 이제 만사형통이라고 “룰루랄라~~~”하면서 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요? 가라고 해서 갔는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고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습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지 의심이 일어납니다. 원망과 두려움이 찾아오지요. 이제 죽었다 싶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가는 오늘 우리 삶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바다 저쪽으로 가고 있는데 풍랑이 일고 벌써 배에 물이 들어오고 있나요? 그러면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깊은산 20180929)

#세월호 참사 1628일째 : 지금까지 지배해온 결과를 낳은 조사와 수사는 해양적폐세력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은 본래 심판이 주요 업무로서 해양사건에 대한 준사법기관으로서 판결을 위한 업무를 해야 합니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의 판결 업무를 ‘재결’이라고 합니다. 올해 세월호참사 4주기 MBC에서는 단독 보도를 내며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이 재결을 하지도 않은 채 자신들이 그동안 한 번도 해오지 않았던 작업인 ‘특별조사보고서’까지 내서 검찰의 공소장을 뒷받침해준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며 졸속 보고서라는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양적폐세력이 내린 결론은 일종의 ‘교리’처럼 되어왔고 이 교리에 대해 사법부조차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법부는 세월호참사 원인에 대한 해양적폐세력의 결론을 수용하였고 급선회에 대한 원인도 해양적폐세력이 주장하는 조타이상-정비불량에 관한 영역으로만 한정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극우보수세력이 조사와 수사, 재판까지 다 됐는데 왜 또 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전면 재규명)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