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com)
2015/6/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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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징조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얻으면 적은 멸망하게 된다고 하였지요.
여기서 바울이 보는 구원의 징조는 첫째로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소식이라고 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정신으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사람은 정신으로 삽니다.
얼이지요.

그것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얼빠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정신 차리자고 합니다.
그렇게 내가 뭐하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고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를 늘 잊지 않고 기억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앞에서 한 마음으로 그 복음을 이루어간다면 그것은 나의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학생에게 구원의 징조가 있습니다.
아내에게 구원의 징조가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도 구원의 징조가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원의 징조는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보면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라기보다는 두려움입니다.
미움은 애증, 조금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에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4:18)"

멸망의 징조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구원의 징조는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죄의식으로 예수님을 믿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그렇게 구원받기 위해 불안하고 안절부절하게 삽니다.
율법 아래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면 벌 받을 것같고, 이러면 죄짓는 것같고, 사람들이 나를 해칠까봐 두려움에 절어 사는 것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 아래서 사는 사람은 늘 부족함이 없는 다 이루어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물을 받아 누리며 삽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는 그 믿음에 사는 것입니다.
믿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들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 그 봄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생각, 두려움, 수치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를 한번도 떠나신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다 그 사랑 속에 있는 일입니다.
구원은 나의 두려움과 수치심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야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어떤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징조입니다.
누가 나를 대적하더라도, 그 무엇이 나를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 사람, 세상이 어쩌지 못하는 하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 두려움이 없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살 때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을 알 때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다 사랑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을 몰라서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징조입니다.  

바울은 그런 구원의 징조를 가진 사람의 특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놀라운 해석과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이 특권이라니요.
부활과 십자가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부활을 경험하기 위한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공허하고,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맹목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받는 고난, 고통은 특권입니다.
고난이 나의 나 됨을 가장 잘 실현해 가는 도구이며, 길, 안내자가 될 것이 때문입니다.
깨어나 보는 눈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합력하여 이루어가는 선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매트릭스의 지배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거기에 순응하여 노예처럼 살지만, 고통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다시 인식하고 깨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고통으로 인해 삶의 허상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고통은, 고난은 그렇게 깨어남으로 안내하는 천사의 역할을 합니다.

고난을 그런 특권으로 바라보는 믿음의 눈, 고백을 우리가 함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를 믿는 것은 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와 하나가 되는 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빈센트는 "고난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약혼할 때 받은 선물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죽음조차도 감미롭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고난조차 감미로운 것입니다.

오늘 나는 이렇게 바울과 똑같은 싸움을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고난과 함께 하는 바울의 투쟁을 보았고 소문으로 듣고 있었듯이, 오늘 우리는 서로의 투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오늘 나의 삶이 나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보다 앞선 수많은 선배들과 같이 그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받고, 그 사명, 나의 일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오늘 하루를,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의 징조입니다.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고 했는데 그 살과 피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의 '나'는 육체가 아니지요.
나는 생명의 빵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그 나는 요한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갈릴리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역할일 뿐입니다.
그처럼 진짜 나의 본래는 생명입니다.
그냥 생명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지요.
선생님은 제자에게 먹히러 오신 하늘에서 내려온 진지입니다.
그런 앎으로 먹고 먹히는 것이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 삶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 생명의 말씀입니다.
(#깊은산 20150614)

* 세월호 참사 425일 - 세월호 유족들이 모여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이 "순수 유가족"이라는 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언론들이 앞 다투어 "유가족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다"는 식의 보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또 거기에 장단 맞추어 "순수 유가족" "배후 세력" 운운하며 개념 없는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유가족 무력화시키기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사실 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흘린다. 그러면 어리석은 국민들은 기다렸다는듯이 마치 앵무새가 따라하듯이 조중동과 kbs mbc sbs ytn에 흘러나오는 말을 되뇌인다. 자기들이 생각없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유족들에게 어떻게 잔인하게 다가가는 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도대체 '순수 유가족'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런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다. 말이 안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유가족이면 유가족일 뿐이다. 그러면 '순수 유가족'이 있으면 '불순 유가족'도 있단 말인가? 적어도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나 알고 얘기해야 한다. '순수 유가족'운운 하는 것은 정치인들이나 정부나 매스컴 종사자들의 무개념과 사악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박인환, 세월호 Tip)

당시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냐고 했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눈과 귀가 열려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마침내 그래서 우리도 하늘로 돌아가는 나의 길을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진짜 원래 생명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도 숨을 마시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려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지요.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숨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것을 안다면 숨을 한번 마시면서 삶과 죽음의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부족한가요?
내 목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무엇도 가질 수 없고 주어진 것을 누리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로 깨닫게 될 때 찾아오는 평화와 자유가 구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굶고 사는 것이지요.
(#깊은산 20150615)

* 세월호 참사 426일 - 새누리당이나 정부, 그리고 언론은 "순수유가족은 정부가 하자는 대로 머리 숙이고 돈 몇 푼 보상해주면 그것을 끝낼 사람들"이고 "불순유가족은 보상금 더 많이 받으려고 불순세력과 연계해 있다"고 백성들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을 게다. 새누리당과 정부, 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가족의 배후에는 반정부. 종북 세력이 있고 유가족들이 그들과 손잡고 반정부 운동을 한다"는 식으로 매도하였다. 세월호 참사 초기, 일부 야당의원들이 유족들을 찾아가 옆에 앉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유가족이 불순세력과 연계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온 국민이 알게 된 것이지만, 새정련이라는 거대야당 역시 세월호의 아픔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새누리당 이완구와 새정련 박영선이 누더기 별법에 덜컥 합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새정련이 유족들 곁에 앉았던 것이 전혀 유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자기들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괘씸하다. 각설하고, 새누리당 . 정부. 언론은 세월호 족의 배후설을 제기하며 요상한 방향으로 백성들을 호도하였으나 그들이 제기한 배후설은 허상이다.(박인환, 세월호 Tip)

또한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는데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영과 육이라는 것은 4차원과 3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지만, 육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삶과 그것 너머를 보며 사는 삶은 다릅니다.
또 다르게는 의식의 수준으로도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의 수준에서 보면 다 죽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과 사랑과 평화의 수준에서 보면 다 살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음식도 소화가 되지 못하면 독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보고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깊은산 20150616)

* 세월호 참사 427일 - 며칠 전 후배 양재성목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형님, 세월호 족들이 1년 넘도록 이렇게 흩어지지 않고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을 보니 배후가 있긴 있나봅니다" 그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속으로는 "아니, 이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되었나? 왜 그런 새누리스런 소리를 하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양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유족들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뒤를 봐 주시지 않는다면 이거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맞다. 세월호유족의 배후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억울하게 죽임당한 희생자의 부모, 가족의 배후이시다. 그러니 세상의 권력자들과 간신배들이 아무리 그들을 폄훼하고 넘어뜨리려 해도 안 될 것이다.(박인환, 세월호 Tip)

제자들 여럿이 예수의 말씀이 어렵다고 수근거렸습니다.
그들은 이제껏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따랐던 거죠.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게 됩니다.
선생님을 따르면서 아버지가 따르게 한 것을 알지 못하고 끝까지 내가 따른다고 나를 앞세우면 그 나 때문에 선생님만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나까지도 등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버려야지요.
버리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기에 예수는 버림을 받았고, 그래서 다시 채움을 입은 것입니다.
(#깊은산 20150617)

* 세월호 참사 428일 - 세월호 유족들, 특히 단원고 희생 학생 유족들의 결집이 1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결속과 투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너무 의문이 많은 사건. 2.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구조하지 않은 엽기적인 사건, 그래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것이 기본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족들의 한 경험이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나기 전 해인 2013년 7월, 공주사대부고 학생 5명이 태안 해병대 캠프에서 희생되는 사고가 있었다. 그 때 단원고 학생 부모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냐하면 공주사대부고 학생들보다 1주 앞서서 단원고 학생들이 그곳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1년이 채 안 되어 단원고 학생들이 참사를 맞게 되니 1년 전의 참사가 먼 데 있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희생학생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마음은 "더 이상 이와 같은 참사를 당하는 국민이 없어야 한다"는 소명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네 아이들의 희생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세월호 유족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족을 폄훼하거나 세월호 유족들에게 주홍 글씨 새겨주기에 여념이 없다. 바보들이다.(박인환, 세월호 Tip)

버리고 비우지 못하니 수군거리고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꽉 차 있는 잔을 무엇으로 무슨 재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왔으니 떠나갈 날만 남았고 떠나가니 돌아올 날만 남은 거지요.
그는 늘 자기 일을 하시고 몸소 제자들을 불러 곁에 두셨지만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외로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으니 다른 무엇이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너는 너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나머지는 신이 하실 터입니다.
(#깊은산 20150618)

* 세월호 참사 429일 - 정부의 시행령은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쓰레기 악법입니다. 정부의 시행령 때문에 국민의 염원으로 국회가 만든 '세월호특별법'은 아직까지도 유명무실하고 특별조사위원회는 가동도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또 결국 시간만 끌다가 유야무야 되기 쉽습니다. 정부 시행령은 폐기 되어야 하고 유가족과 특조위, 국회가 청원하는 "시행령 개정안"과 "특별법 개정안"은 수용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부는 국회법을 악용해서 시행령으로 국회의 법을 위반해 온바 "국회법 개정안"까지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세월호는 이렇게 우리 사회의 적폐를 민낮으로 드러니고 있습니다. 이에 거부권 운운하며 이를 가로막는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은 물러나야 합니다. 서명해 주세요. http://416act.net/notice/2943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지요.
그런데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분하고 원망스러워서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분하고 화가 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화가 난다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괴롭히는 배신감과 외로움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화가 날 일일까요?
아니지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지 화가 날 일이 아닙니다.
화는 내가 내는 것이지요.
내 생각과 기준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께서는 원래 그것을 알고 계셨기에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그렇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환경과 조건을 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흔들린다면 뭔가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깊은산 20150619)

* 세월호 참사 430일 - 국회 입법조사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규정하는 정부 시행령이 모법(세월호 특별법)의 위임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시행령을 축소 제정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사실상 이를 뒷받침하는 입법기관 자문기구의 해석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지요.  입법조사처가 시행령의 문제로 꼽은 것은 ▲ 초기 인원을 90명으로 정원을 제한한 점 ▲ 사무처 조직을 임의로 편성한 점 ▲ 공무원 파견을 통한 위원회의 인사권한을 제한한 점 등입니다.

너희들도 떠나려느냐고 하는 선생님께 베드로는 선생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냐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 너머의 것을 보고 들려주시는 영생의 말씀이 참으로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니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믿음인데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기는 결단이지요.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익숙한 것에서 떠남이었고 키에르 케고르에게 믿음은 물음을 넘어선 자리라고 했습니다.
내 이해와 생각과 관념을 넘어선 세계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떠나야 할까요?
모르고 어려우면 더 가까이 와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깊은산 20150620)

* 세월호 참사 431일 - 황교안이 국무총리가 되니 메르스가 진정국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을 잡고 손석희와 박원순을 잡고 이제 세월호 유가족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슴을 치며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아빠 엄마였다구요. 나만 아니면 되었지라고 살아 내 아이들이 수장되었다고 말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의식이 성장하고 있는데 정치와 권력은 도리어 70년대로 회귀하고 있으니 누구를 탓해야할까요. 가만히 있던 내 탓이고 모두의 탓입니다. 이제라도 돌이키지 않으면 12.12가 재현되고 518일 재현되겠지요. 70년대 유신과 80년대 공안 통치와 어쩜 이리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 착오적인 냉전을 사는 사람들, 일제 식민의 잔재를 청산 못한 한국 현대사만이 가지고 있는 질곡과 적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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