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com)
2015/5/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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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해지는 사랑  

바울은 우리 모두는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요?
이렇게 서로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큼 설레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진실로 그와 일체가 될 때 그 사랑은 나를 통하여 이웃에게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은혜로 영생을 얻는 것은 예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하며 살 수밖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되어 살아가는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참 소중한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나도 그렇게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나를 위한 기도이고, 또 내가 또 다른 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바울이 마음에 품은 이 기도는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게 된다고 하지요.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경험해도 아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보지 못하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 간 자식을 둔 어머니는 길을 가다보면 휴가 나온 군인들만 보입니다.
아기를 가진 임산부는 길을 가다보면 배가 나온 임산부만 보입니다.
연애를 하는 청년은 길을 가다보면 연애하는 연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암에 걸리고 보면 그렇게 암환자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암환자가 없었을까요?
길에 휴가 나온 군인들이 없었나요?
아이를 가진 임산부나 연인들이 길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원래 다 있었습니다.
관심과 사랑이 없으니 보이지를 않았을 뿐입니다.
길가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을 들여 보지 못하면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인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신비와 하늘의 은혜가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사랑은 항상 지식에 이르는 길입니다.
학생이 어떤 학과를 사랑한다면 열심히 공부하여서 그 학과에 대해 알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예수와 그 진리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과 생각을 예민하게 합니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열정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그래서 내 사랑이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욱 풍성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님들의 사랑 또한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해진 사랑으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순결하고 흠이 없이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그 뜻에 합하여 허물과 흠이 없이 순결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다 허물과 흠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이 높아갈 때에 그런 허물과 흠이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맑은물을 부어주고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여지고 허물없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장)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양로원 예배를 드리며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는 장면을 나누는데 정신이 있으신 할아버지께서 물으십니다. 호기심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으신 할아버지시지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죽이려고 했느냐구요. 빌라도도 이상했을 거예요. 유대인들이 동족인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로마총독에게 고발을 하고 있으니까요.
왜 그랬을까? 할아버지의 물음을 따라 함께 가봅니다. 유대 권력자들은 예수가 두려웠던 겁니다. 자신들을 굳건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체제를 흔드는 사람이 예수였으니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신들의 존재 근거와 기반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법'과 '성전법'이었는데 예수는 이 두 가지를 여지없이 흔들었지요. 그 법의 형식이 아니라 법의 정신이 지켜져야 하는데 정신을 사라지고 껍데기 밖에 없었으니까요.
안식일은 약자를 보호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정신인데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겁니다. 생명을 살리자고 있는 법이 생명보다 제도가 앞서 버린 거지요. 성전에 들어가 폭리를 취하고 제사를 드리려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장사하는 사람을 쫒아내자 종교 지도자들이 겁을 먹었습니다. 무릇 지도자의 자리는 백성들을 삶의 본질과 근원으로 안내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지요.
예수께서는 당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면서 왜 국가 안보가 필요한지를 몸으로 역설하셨던 겁니다. 남과 북은 형제이고 하나인데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통일 가로막고 사상과 종교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인권을 탄압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북한에 가고 권력과 체제를 비판하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도 그것이 백성의 삶과, 정의와 생명과 인권에 반하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가 예수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예수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죽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죽지 않고 살아 있고 고발을 당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는 오늘도 차벽을 넘어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계십니다.
(#깊은산 20150503)

* 세월호 참사 383일 - 참사를 이겨낸 선진국들의 사례를 들며 말없이 고통을 이겨내는 성숙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9·11 테러 당시 자국의 국민을 구조하다 희생된 소방관들의 수가 343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똑같이 구조에 실패한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 사고를 예로 든다면 상황은 더 심각하지요. 단언컨대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상황보고를 받은 지 7시간 만에 회의장에 나타나 알프스에 사람들이 떨어졌다는데 찾기가 그렇게 힘드나요? 같은 대처를 하지 않았고, 관련 공항의 관제탑이 제출한 통신·항로기록에 편집이나 누락된 구간이 있을 리 만무하며,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구조현장을 차단하고 구조경험이 전무한 민간업체에 일을 맡길 리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정보국이 평소 여객기 운영을 관리하고 이런저런 사항들을 꼼꼼히 지적해온 문서 파일이 나올 리도 없을 거며, 보상금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조건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진상을 최우선으로 규명합니다. 내 가족이 어떻게,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아는 일이야말로 유가족이 비로소 가슴에 희생자를 묻을 수 있는 인류, 인간의 공통된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갔습니다.
날이 저뭅니다.
선생님은 날이 저물도록 산에서 내려오시지 않았고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생님 없이 바다로 내려가지요.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왜 떠났는지, 무엇을 하고 계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한채 말입니다.
이런 순간에 어찌해야할까요?
선생님이 혼자서 산으로 가셨으면 선생님을 따라서 산으로 가야했던 걸까요?
여기서 산은 홀로 있는 자리, 생에 있어서 우리가 오르고 넘어야할 시련과 신성이고 바다는 우리가 처한 삶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깊은산 20150504)

* 세월호 참사 384일 - 살릴 수 있었던 304명의 목숨을 넋놓고 수장시킨 정부가, 1년이 되도록 진상 규명조차 하지 않는 정부가, 겨우 들고 나온 것이 돈이라는 사실에, 아니 정확히는 돈을 간판으로 한 언론플레이란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또 진상규명을 위해 제대로된 특별법 시행령을 촉구하는 유가족들을 짐승 대하듯 물대포로 몰아대는 것을 보면서 제 정신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덮고, 묻고, 잊음으로써 현대사를 건너온 민족입니다. 그것이 세월호입니다. 그들은 또 이 문제를 덮으려 하지요. 묻으려 하고, 적당히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잊을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적당히 덮고, 묻고, 시간을 끄는 정부와 여전히 잊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국민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단언컨대 이 땅에 미래는 없습니다.

때로 우리 삶에 어느 순간 이렇게 혼자가 되어버린 느낌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음을 외로움으로 남겨두지 않고 진정한 고독의 기회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성이고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성숙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평생에 걸친 내면의 싸움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 고독을 통해 타인을 다시 보고 존경하며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홀로 나를 바라보지 않고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 의존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로의 행복을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너 때문에 행복하거나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집착일 수 있습니다.
내가 홀로 설 수 있어야 집착을 넘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예수께서는 홀로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산 아래 남아 있습니다.
(#깊은산 20150505)

* 세월호 참사 385일 - 진상을 규명하자는 외침이 왜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이며, 세월호가 언제 정권의 발목을 잡았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손을 뿌리치고 제일 먼저 배를 빠져나간 것은 다름 아닌 정부였지요. 팬티 차림의 선장처럼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정치적 피난부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적 수반으로서가 아니라 행정적 수반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말이 주가 되어선 안됩니다. 안행부이건 중대본이건 재난 컨트롤 타워가 세워지고 이 참사의 책임을 반드시 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지요. 심지어 시간이 흐른 후 책임자들은 영전을 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 타워이거나 세월호 참사가 단순 해상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혼자 있음을 외로움(loneliness)이 되게 내버려두느냐, 또는 그것이 우리를 고독(solitude)으로 인도하도록 허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음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독은 평화스러운 일입니다. 혼자 있음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남에게 매달리게 하고,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존재의 독특성을 존경하게 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내게 합니다. 우리의 혼자 있음을 외로움이 되지 않게 하고 고독으로 성장하게 하는 일은 평생에 걸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는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조언을 구할 것인지에 관하여 의식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고독을 찾게 될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선생님이 떠나고 하나님도 떠나고 그렇게 날이 저물어 버렸습니다.
그런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묻게 됩니다.
대부분은 이날 제자들처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선생님은 산에 남겨두고 바다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익숙한 곳인 가버나움으로 가겠지요.
거기에는 먹을 빵이 있고 마실 물이 있고 아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혹자는 선생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탓하며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가 선생님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백성입니다.
삶을 "예"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내 생각과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다로 간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는 이야기는 그런 삶에서 직면하는 오늘 나의 이야기입니다.
(#깊은산 20150506)

* 세월호 참사 386일 - 쓰레기 대통령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강제 시행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 건설은 정부가 해주는게 아니라 바로 우리 피해자 가족과 국민 여러분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피해자 가족들 중심으로 국민 여러분들께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의 행동을 모아 주신다면 머지않아 반드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한 안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416 가족협의회>의 가족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십시오. 저희도 국민 여러분들께서 포기하지 않도록 끝까지 앞장서겠습니다.(416가족협의회)

선생님을 두고 바다로 나간 제자들은 두 가지 두려움을 겪습니다.
먼저는 바다에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평생을 이 바다에서 살았는데, 다 알고 있다고 여긴 인생인데 진퇴양란에 처하게 된 거지요
또 다른 두려움은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누가 바다 위를 걸어옵니다.
어찌 무섭지가 않을 수가요?
다른 곳에는 유령이라 여겨 기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다에서는 노를 저어야하는데 걸어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이야기는 그런 우리의 상식과 생각, 판단과 기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면 윈드서핑을 하거나 수상스키를 타면 되지요.
오늘 삶이라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사람을 보아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거기에 빠지지 않고 유유히 지나갈 수 있는 힘이 진짜 기적이지요.
(#깊은산 20150507)

* 세월호 참사 387일 -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철저한 진상조사는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 앞에서 스스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철저한 진상조사의 핵심은 조사기구의 독립성과 조사과정의 공정성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달 30일,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독립성과 진상조사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쓰레기 시행령 수정안을 차관회의를 통해 처리하더니 드디어 오늘 국무회의를 통해 확정지어버렸습니다. 이는 오직 독립적 특별조사위원회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만이 우리 피해자 가족들은 물론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당연한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더군다나 피해자 가족과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CC-TV 불법조작을 통한 감시, 차벽, 캡사이신, 최루액대포 등을 동원한 불법적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정부를 보면서 왜 이토록 기를 쓰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방해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유가족 성명서)

선생님을 산에 두고 자기들끼리 바다를 건너가는 이들은 이미 제자가 아닙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판단이 선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만나는 것이 바람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나는 바다인 것입니다.
그런 밤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 바람과 홀로 맞서는 것이 다시 제자가 되는 길이기에 이것 또한 허락된 선물인데 그렇게 보지 못하니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받는 상처, 미움, 질병, 억울함, 부도와 이혼, 배신과 실연...
다 내가 홀로 겪어야할 일이기에 나만의 바다로 내가 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아야지 원망으로 한숨으로 보는 한 생각의 그물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니 기회가 아닌 환란과 역경이 될 뿐입니다.
(#깊은산 20150508)

* 세월호 참사 388일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위법 시행령을 즉각 폐기하고 특조위의 시행령 원안을 수용함으로써 대통령과 정부가 세월호참사 진상조사의 적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십시오. 정부는 CC-TV 불법조작을 통한 감시와 차벽, 캡사이신, 최루액 대포 등을 동원한 불법적 공권력 사용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십시오. 그리고 관련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정부가 더 이상 헌법 파괴자, 국민의 적이 아님을 증명하십시오. 세월호 선체인양 선언 후 진행상황에 대해 <416 가족협의회>와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의견을 수렴할 공식적인 협의체를 구성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선체인양 선언이 국면전환 용, 시간 끌기 용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십시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었고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큰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만나게 되었던 거지요.
오늘 캐나다에 있고, 미국에 있고, 한국에 있고, 학생으로, 사업가로, 실업자가 되어 살아가며 만나는 바람과 파도는 또 다를 겁니다.
저 역시 그런 저만의 파도와 바람을 만나고 있지요.
선생님을 따라 산으로 가지 않고 바다로 내려와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모시지 않고 배를 타서 그렇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에 바람과 파도가 높은 것은 주께서 그 가운데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때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고 있는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배 아래에서 잠들어 계셨습니다.
당황한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예수를 찾아서 깨웠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있다고 여기지만 선생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예배를 드린다고 앉아 있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지 않느냐는 거구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판단하고 따지며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잠들어 있는 예수를 깨우자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깊은산 20150509)

* 세월호 참사 389일 - 이석태 위원장을 비롯한 17명의 특별조사위원들은 자신들을 추천한 정당과 단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건설을 바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특히 안전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역사적인 책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특조위의 생명은 정부 등 조사대상으로부터의 독립성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상조사위원의 책무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끈질기고 집요한 외부의 방해는 물론 내부로부터의 치밀한 방해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해주십시오.(유가족이 특조위에 드리는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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