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com)
2014/5/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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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다른 차원  


물론 그렇게 보이고 감각되는 차원에서 보는 눈이 있습니다.
보이는 1%의 현실과 보이지 않는 99%의 현실이 있지요.
99%의 현실이 1%의 현실과 함께하는데 1%가 전부인 것처럼 산다면 그런 차원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서는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서 등장하는데 유대인도,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자손도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이긴 후에 그를 알아보고 자기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닌줄 알고 예물을 드립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족보가 전부라고 그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족보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눈이 또한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서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래의 나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누구의 후손이고 어느 시대에 살았던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낳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씀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나를 볼 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말입니다.
메시아가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셨다면 그를 믿고 그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입니다.
아니 사실은 세상 만물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로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런데 불행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인생에 다윗의 후손이 있고, 율법학자들이 있고, 죄인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 틀과 형식에 매여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옳던 그르던 율법학자들에게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그들의 권력과 명예와 전통을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강화, 정당화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떤 예복을 입고 있는지, 어떤 나 아닌 것들로 나를 치장하여 그렇게 보이기를 좋아하는지 돌아봅니다.
나는 멋있는 사람, 나는 선한 사람, 나는 친절한 사람, 나는 겸손한 사람, 나는 성공한 사람, 나는........
우리에게는 입어야할 예복이 있고, 벗어야할 예복이 있습니다.
벗어야할 예복은 겉치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그런척 하는 것입니다.
안에는 음란과 탐욕이 가득하면서 이것이 대의를 위한 것인양, 성스러운 것을 위한 것인양 포장하고 살고 있는 가식과 위선, 회칠한 무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나에게 화살을 돌려봅니다.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지 맙시다.
그것이 나를 만들지 않습니다.
내 품위와 내 분위기는 내 안에서 일어나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복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묻고 있거나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대로 살지 못하는 그들,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칭찬받고 좋은 소리를 듣기를 좋아해서 내 모습과 내 공적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지나가는 그것에 매달려 그 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이웃을 챙겨주고 돕기는커녕 오히려 권모와 술수로 과부의 가산을 삼킵니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려 하지요.
길게 기도하며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모습, 벗어 버려야겠습니다.
아니 벗지 않으려고 해도 벗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끝이 이르기 전에 알아야 본질로, 원래의 삶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실은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지 심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헤매며 살아가는, 깨어나지 못해서 끌려 다니는 삶이 지옥이요, 심판이겠지요.
천국, 하나님나라가 무엇입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왜? 길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내 존재를 알고,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 살아갈 때 거기가 천국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만큼 엄한 심판은 없습니다.
오늘 다시금 내가 율법학자로 살고 있지 않는지 한번 더 돌아봅니다.

(마가복음 12장)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지금’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와 나의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돌아보실 생각을 하시고 바람을 일으키시니 홍수의 물이 빠지기 시작함을 알게 됩니다.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늘 ‘지금’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홍수,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우울과 좌절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백오십일 지독한 그 끝에 서 보니 하나님이 돌아보실 생각을 하셔서 바람을 일으켜 주십니다.
바람은 바라는 것(Hope, Wish)이고 생기(Holy spirit)이고 꿈(Dream)이고 소명(Desire)입니다.
그런 바람을 우리 안에 주시니 우리에게 용기가 일어나고 힘이 치솟습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가운데 행동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럴 때 자유가 찾아옵니다.
바람, 바람이 불어 비가 왔고, 또 바람이 불어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그런 바람을 맞이해야지요.
나에게 찾아온 바람들은 숨으로 내 안에 오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바람이 홍수를 그치게 할 것입니다.
우리 생의 홍수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바람을 맞이해서 바람을 이루는 길입니다.
지금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바람이 홍수를 일으킬 것이고 홍수를 그치게 할 것입니다.
(#깊은산 20140518)

그렇게 멈출 줄 몰랐고 발밑 그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 깊음들과 하늘의 문도 닫혀 머리 위로 쏟아 내리던 비도 그칩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지요.
그런데 내가 하겠다고 하다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맙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 거기서 떨어져 나와 여기 주 안에서 보면 문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달에는 아라랏 산에 머물러 쉴 것이고, 열째 달에는 산봉우리들이 드러날 거예요.
그런 장면들을 상상으로 그림으로 맞이하며 연상하니 가슴이 뜁니다.
이런 것을 ‘환상을 본다’고 말하나 봅니다.
오늘 내가 맞이하는 삶의 홍수 한 가운데서 그런 일곱째 달과 열째 달을 그려 봅니다.
홍수 한 가운데서라도 그런 날들에 대한 소망과 꿈을 놓지 않고 사는 것이 노아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나의 기다림과 노아의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은 신이 당신을 찾아오라고 사람 안에 남겨두신 흔적인가 봅니다.
그리움만큼 삶이고 사람이니 오늘 나에게 있는 그리움의 깊이를 만나봅니다.
아, 그날이 오면~
(#깊은산 2014051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그가 바람을 일으키시어 홍수는 곧 그칠 것이고 물이 빠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내가 마른 땅을 밟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찾아오는 소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돕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실재에 부딪혀 존재를 만나고 실존으로 설 수 있지요.
그렇기에 오늘 나에게 찾아온 문제, 홍수는 내가 되어가는 통로이고 기도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거라고 하지요.
무엇을 얻을 수 있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이런 과정에 이런 순간에 이런 느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영원에 든든히 뿌리를 내려 나와 이웃과 이 땅을 다시 바라봅니다.
참고 견디며 매일 새로워져 오늘 나의 책임을 다합니다.  
(#깊은산 20140520)

"영원에 의해 단절된 시간에 존재의 빛이 드러난다. 이 존재의 빛 속에 사는 사람을 실존이라 한다. 실존의 세 가지 성격은 존재의 명확성 속에 사는 것, 이 내재를 가지고 참고 견디는 것,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신앙을 지키고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자기의 책임을 깨닫고 자기의 책임을 지키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어른의 세계, 그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인간뿐이다. 신도 천사도 동물도 식물도 실존은 아니다. 실존만이 자기의 천명을 깨닫고 사명을 다하고 운명을 개척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계속 자기를 벗어 나가는 존재다. 일신우일신, 매일 매일 새로워지는 것이 실존이다.(김흥호)"

하나님은 사람에게 특별한 생각을 하게 하시고 그 생각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니 지금 나에게 찾아온 바람(Desire)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명입니다.
사람은 그 바람이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존재입니다.(창11:6)
찾아온 홍수 가운데서 바람을 따라 참고 참아 그 진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지나고 때가 되어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내어 보내 봅니다.
비둘기도 내어 보내구요.
그리고 마침내 함께 있던 모든 생물들과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방주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방주가 안전하고 익숙하고 좋다고 방주 안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들어갈 때가 있고 나올 때가 있습니다.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머무를 때가 있고 떠날 때가 있습니다.
산에 오를 때가 있고 산에서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때를 따라 삽니다.
지금은 무엇을 할 때인가요?
(#깊은산 20140521)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가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8:22)

여전히 멈추지 않는 이 슬픔과 분노는 무엇인지요.
무능과 비겁이 이토록 미안하고 아픈 것은 무엇인지요.
그래도 감추지 않고 이리 부끄러워 할 수 있어 천만 다행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셨지요.
'눈'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동·서·남·북·위·아래·가슴'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걸어 가 보라 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만큼 느끼는 만큼 걸어본 만큼이 나의 삶입니다.
오늘 슬퍼하고 분노하고 미안해하고 아파하고 드러내고 부끄러워하며 정직하게 보고 머리와 가슴과 몸이 이끄는대로 가라고 하십니다.
“예!” 주님, 오늘 그러겠습니다.
(#깊은산 20140522)

깊은 슬픔(도종환)

슬픔은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슬픔은 안개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바닷바람 불어와 나뭇잎을 일제히
뒤집는데
한줄기 해풍에 풀잎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듯
나도 수없이 쓰러진다
분노가 아니면 일어나 앉을 수도 없다
분노가 아니면 몸을 가눌 수도 없다
기도가 아니면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다

맹골도 앞 바닷물을 다 마셔서
새끼를 건질 수 있다면
엄마인 나는 저 거친 바다를 다 마시겠다
눈물과 바다를 서로 바꾸어서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을 통곡하겠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낼 수 있다면
바다 속에 잠긴 열여덟 푸른 나이와
애비의 남은 날을 맞바꿀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썰물 드는 바다로 뛰어 들겠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낼 수 있다면

사월 십육일 이전과
사월 십육일 이후로
내 인생은 갈라졌다

당신들은 가만히 있으라 했지만
다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동안 내 자식이 대면했을 두려움
거센 조류가 되어 내 자식을 때렸을 공포를
생각하는 일이 내게는 고통이다
침몰의 순간순간을 가득 채웠을
우리 자식들의 몸부림과 비명을 생각하는 일이
내게는 견딜 수 없는 형벌이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견딜 수 없다
내 자식은 병풍도 앞 짙푸른 바다 속에서 죽었다
그러나 내 자식을 죽인 게
바다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참혹한 순간에도
비겁했던
진실을 외면했던
무능했던
계산이 많았던 자들을 생각하면
기도가 자꾸 끊어지곤 한다
하느님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다가
물음은 울음으로 바뀌곤 한다

이제 혼자 슬퍼하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함께 울겠다
파도가 다른 파도를 데리고 와
하얗게 부서지며 함께 울듯
함께 울고 함께 물결치겠다
함께 슬퍼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걸어다닐 수 있으랴
그들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위로 받을 수 있으랴

정작 잘못한 게 없는 많은 이들이
미안해하며 울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눈물이 내 눈물이란 걸 안다
그들의 분노가 내 분노라는 걸 안다
그들의 참담함이 내 것인 걸 안다
이 비정한 세상
무능한 나라에서
우리가 침묵하면
앞으로 또 우리 자식들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노란 리본을 달고 또 단다는 걸 안다

내 자식은 병풍도 앞 짙푸른 바다 속에서 죽었다
오늘도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때린다
오늘도 눈물은 바닷물처럼 출렁이며 나를 적신다
한 줄기 바람에도 나는 나뭇잎처럼 흐느낀다

홍수가 그친 후 노아가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 방주 안에서 내보낸 까마귀는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녔습니다.
이어 내보낸 비둘기는 땅이 아직 물속에 잠겨 있어 발을 붙이고 쉴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방주로 돌아오니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받아들였습니다.
이레 후에 비둘기를 다시 내보내니 저녁 때가 되어 싹이 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돌아와 노아에게 땅이 마른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이레 후에 비둘기를 내보내니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까마귀는 주인에게로 돌아오지 않아 배은망덕하고 비둘기는 주인의 은혜에 보답고자 땅이 마른 것을 알려줍니다.
까마귀는 독립성이 강해 안전한 보금자리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고 비둘기는 비겁하게도 갈 곳이 없으니 돌아왔다가 갈 곳이 생기니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홍수가 그친 땅에서 자기 일을 했는데 보는 눈에 따라 이리도 평가가 다릅니다.
홍수가 그친 오늘 까마귀의 자유로운 영혼을 배우고 비둘기의 순수하고 배려 깊은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깊은산 20140523)

방주 안에서는 그 많은 것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나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어디 좋은 일만 있었겠어요?
거기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사자와 사슴이, 호랑이와 토끼가 어울려 사는데 말입니다.
좁고 답답하고 모자라고 아쉽고 불편한 것이 방주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방주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상함이 없을 거예요.
상할 수 있다면 생각 안에서만 그렇겠지요.
이런 약속을 맞이해 봅니다.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어느 하나 빼고 더할 것이 없이 나에게 딱 알맞은 사람, 관계, 일이란 말이지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없이 그렇게 다 어울려 나를 나되게 하는 방주입니다.
(#깊은산 20140524)

PS. 지금 거리에 있는 아들, 딸들이 참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거리에 있을 때 그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 나이가 되어 있네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또 제자리라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 때 거리에 있었으니 오늘 거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덜 미안해요. 힘내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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