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lian.net)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4/4/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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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  


하나님은 산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닌데, 혹시 나는 죽은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매여서, 그런 형식과 껍데기로밖에 살아가지 못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질 것들이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는 본질, 메시지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지길 빕니다.

그 때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와서 계명 중의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대답을 듣고는 감히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이 율법학자도 예수에게 일종의 시험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더 자랑하고 싶어서 묻고 있다고 할까요?
또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를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작은 것 하나라도 알고 그렇게 누리며 사는지, 큰 것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의논하고 묻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모습을 그렇게 돌아보게 됩니다.

자, 예수께서는 사랑이 첫째라는 율법학자의 말에 그가 하나님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왜 멀지 않다고 하셨을까요?
이 이야기와 상황을 보면 칭찬은 아닌듯하지요.
대답을 잘한 율법학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가까이 있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씀이기도 하죠.
예수의 메시지에서 사실은 '지금' 나는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데 이 율법학자는 하나님 나라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멀지 않게 서서 지켜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논쟁만 하고 묻고만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사는 삶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과 알고 말한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가만히 이 말씀 앞에서는 나는 어떤지,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영성 생활을 안내하면서 정작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불행한지 돌아봅니다.
자기는 옆으로 걸으면서 자기 새끼는 옆으로 걷지 못하게 하는 게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요즘 친절해야지 친절해야지 하면서 친절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일상과 현실에서만 만나게 되는 화두, 문제입니다.
일상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쓸 수 있고, 형식을 유지할 수 있는 방패막이들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벗고 이제 정말 나의 모습, 내가 스스로 가꾸어가야만 하는 나의 삶을 만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일상의 삶은, 내 가족과 나의 일터는 나의 수련장입니다.
내 의식의 깊이와 높이의 현실을 매 순간에 마주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 내 생각의 수준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늘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껍데기가 ‘나’인줄 알고, 다른 사람이, 가족이, 학교가, 직장이 만들어 놓은 나의 허상에 속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쯤은 다 벗고 참 ‘나’를 만나보아야지요.
뒤죽박죽이고 우왕좌왕하는 오늘의 삶이 그래도 감사한 이유는 그런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짓된 생각이 아닌 참인 사실을 바라보게 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의 향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난과 아픔을 지나며 어둠을 감당한 이들이 맞이하는 눈물의 향연입니다.

(마가복음 12장)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서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이스라엘이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그를 사로잡은 자신의 그림자와 씨름을 하다가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축복을 받아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내 곁에 찾아와 계십니다.
나를 괴롭히고 내 가슴을 아프게 하고 나를 우울하게 하고 수축시키는 그것들, 조건과 상황들을 바라보아주고 말을 건네고 받아들이니 그것들이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는 그림자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지나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아니었으면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는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되었습니다.
(깊은산20140323)

야곱이 밤새 씨름했던 브니엘을 지나 고개를 들어보니 형 에서가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또 다른 씨름입니다.
그는 가족들을 나누어 세우고 맨 앞으로 나섭니다.
형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걱정되었던 야곱이었는데 이제는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맨 앞으로 나아갑니다.
죽지 않아서 힘이 드는 것이지 죽으면 쉽습니다.
용기가 우리를 자유로 이끌어 줍니다.
두려움을 넘을 수 있는 길은 직면하는 것뿐입니다.
창조는 파괴를 통해 오고 부활은 죽음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이제 오늘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깊은산20140324)

야곱은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껏 형을 원망하고 형과 씨름을 했는데 나와 씨름하고 나니 용서가 찾아오는 거지요.
화해와 자유의 길은 자존심이나 계산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형을 속이고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을 갔는데 도망가서는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형에게 가까이 나아가며 절을 합니다.
절을 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를 드리는 것이고 죽어도 좋다는 것이니 결과와 상관이 없이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쉽고 편안합니다.
내려놓고 맡기면 자유합니다.
(깊은산20140325)

자기를 속이고 도망간 야곱이 가까이 와 용서를 구하자 에서는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습니다.
사랑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뭉클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 울 수 있음은 축복입니다.
울음은 생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가슴의 억울함과 서운함, 분노를 풀어내고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각과 머리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슴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면 그 한계가 열려집니다.
그러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형과 동생이 만나고 원수가 친구가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깊은산20140326)

절하고 절을 받으며 만나지는 이해와 용서가 있습니다.
절을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용서하니 살 맛이 나고 쉽습니다.
‘나’를 드리고 ‘나’를 받는 것이 절을 하는 것입니다.
미움이 가장 힘든 일이다..
내가 용서하면 누구보다 내가 용서를 받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 있다면 화해와 용서의 눈물이고 얼싸안음입니다.
서로가 만나는 것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노예가 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해 형들을 만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그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며 화해를 이룹니다.
만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래서 줄 수 있는 것이지요.
(깊은산20140328)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축복으로 알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은 이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형에게 드립니다.
가짜 축복이 아닌 진짜 축복을 받은 야곱의 선택입니다.
가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나면 그 전에 목매달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지요.  
에서와 다투고 부딪히며 씨름하고 있었을 때는 그를 기억하는 것이 지옥이었지만 에서를 만나고 에서가 받아주니 그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넉넉하게 된 것을 나누고 함께 살아갑니다.
나와 화해해 하나님을 얼굴을 보니 에서와 화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축복입니다.
(깊은산20140331)

라멕이 백여든두 살에 낳은 아들 ‘노아’의 이름에는 ‘위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나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고 위로와 희망이라는 것이 ‘노아와 방주’의 메시지이고 복음이고 하나님이 뜻입니다.
노아가 홍수에서 세상을 구원할 배를 만들었듯이 오늘 나도 홍수 같은 위기와 아픔과 고난에서 세상을 구원할 그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그것이 방주였다면 나에게는 가정이고 교회이고 예가이고 양로원이고 글이고 그림이고 내가 지어가는 나의 삶입니다.
‘죄악이 가득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세상에 위로와 희망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러할 때 나는 노아입니다.
순간순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하였고, “꼭 그대로” 하였습니다.
(깊은산20140418)

PS.
노아로 살아가야하는데 노아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지요.
불가항력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든 이순신장군과 태안 기름 유출을 어떻게든 막으라던 노무현대통령 같은 지도력이 그립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진도 앞바다에서 위로와 희망을 기다리는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길, 그런 노아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_()_

사람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습니다.
내가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오늘 나는 하루하루 그런 흔적과 열매를 남기고 삽니다.
그러니 믿음의 아들을 낳고 있는지 생각의 딸을 낳고 있는지, 믿음의 딸을 낳고 있는지 생각의 아들을 낳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쓸어낸 만큼 지구가 깨끗해지고 내가 닦은 만큼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오늘 나의 삶과 자식과 이웃과 나라와 지구가 그러합니다.
다 내 탓이니 나는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깊은산201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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