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com)
2014/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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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포도원  


마가복음 12장의 포도원의 비유는 앞선 권한 이야기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비유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물음의 답으로 본다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겠지요.
포도원을 일군 사람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을 세로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성전에서 주인 노릇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자기 욕심을 채워왔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리고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앞서 왔던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 자신이지요.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마음과 자세를 일깨우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우리들은 어느 입장에 있을까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자,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내 삶을 일구었습니까?
또 내 삶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떤 포도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만히 돌아봅니다.
혹시 포도원이 아니라 사과밭이라서, 꽃병이 아니라 휴지통이라서,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서, 돈이 많지 않아서, 건강하지 않아서 불만과 불평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일구어 놓은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가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판단과 규정으로 업신여기고 정죄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나와 통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과는 늘 거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 생의 울타리를 쳐주시고, 재능과 소질을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 되기에 족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내가 사랑을 배울 수 없고, 내가 사람이 될 수 없었기에 그것을 지금 경험하고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인이 그것을 찾으러 오실 것입니다.
아니 주인에게로 돌아가 내 삶을 고백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가야만 하는 길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지요.
그 때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기가 막힌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런데 지금 찾아오는 주인을, 은혜를, 깨우침으로 받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삶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욕심에 차지 않는다고,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때리고 능욕하고 죽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아들을 보여주셨는데도 그러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삶이 자신의 삶인지 아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어떤 포도원인지, 내가 누구의 것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고, 그 일이 기뻐서, 그 일에 감격해서 하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오히려 예수께 권한을 묻는 이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자기 성전에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어서 하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베풀어진 포도원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자리입니다.
그러니 포도원의 소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방해해도, 간섭에도, 온갖 제도와 사상이 그것을 가로막아도 하나님보다 높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어 하나님의 세상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펑펑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그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를 때리고 능욕할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죽이고 나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덤벼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것이고 나머지 일은 주인에게 맡겨 드릴 것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마가복음 12장)

깊은산에서 온 편지

내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령은 기억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그저 내 생각을 강화할 뿐입니다.
주입된 교리와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나와 호흡하는 말씀으로 만날 때 성경은 성경이 됩니다.
처음 보듯이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성경을 읽습니다.
그렇게 성경과 사랑에 빠질 때 성경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깊은산20140105)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줄거리를 이해하고 연극 대본을 보듯이 역할과 대사를 파악합니다.
‘눈으로 읽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찾아오는 느낌을 알아차리며 느낌을 통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가슴으로 만납니다.
‘마음으로 읽는 성경’입니다.
‘몸으로 읽는 성경’은 성경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 그 안에 있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지금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깊은산20140106)

여기 내 시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는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였다고 말하며 그 처음을 엽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마음이 되어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 분, 예수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그를 믿는 이들과 하나이고 아버지와 저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으니 그 시작도 나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듯이 오늘 나의 복음의 시작을 만납니다.
시작(時作)은 때(時)를 만드는(作) 것입니다.
(깊은산20140107)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위해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어 그 길을 닦아 놓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나의 시작 전에도 이미 심부름꾼이 보내져 있음을 압니다.
그 심부름꾼을 알아보고 사는 삶과 알아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다릅니다.
이미 닦여진 길을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의 길이 닦여져 있듯이 나의 길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심부름꾼이 수백 년 전에 캐나다를 세웠고 은혜 양로원을 준비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심부름꾼이 닦아 놓은 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부모를 심부름꾼으로 보내셨습니다.
나는 그 분들이 닦아 놓은 길을 갑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합니다.
영성의 오솔길입니다.
(깊은산20140108)

* 이제 한국 방문으로 지난 2013년 6월15일부터 오늘까지 200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해 드렸던 ‘깊은산의 일용할 양식 라크마’를 잠시 멈추어야 할듯합니다. 정지가 필요한 때인가 봅니다. 함께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덕분에 200일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어요. 참 많이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곧 다시 만나면 예전과는 또 다를 터입니다. _()_

행복은 무엇을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것들을 풀어내고 발현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은 이 때까지 나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서 아프게 계속 읽혀지는 물음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죽어도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은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길을 모를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양로원 일을 시작하면서 알아냈던 것도 그것입니다.
이 일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해 내야 다음도 있습니다.
이 일이 아니니 다른 일을 찾겠다고 하면 그 다른 일도 역시나일지도 모릅니다.
(깊은산20140114)

지난 제주 방문 때 에미서리 일요 Service에서 리더십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습니다.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메시지, 쿠바와 스페인 전쟁 때 미국 대통령이 쿠바 반군인 가르시아 장군에게 전생의 승패가 달린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르시아 장군은 쿠바의 산 중에 숨어 있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 때 메시지를 전할 임무를 받은 장교는 가르시아 장군이 누구인지, 가르시아 장군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시아 장군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적지를 향해 단신으로 길을 떠나고 지시 받은 그 임무를 어떻게든 완수 합니다.
세상이 기다리는 사람은 이런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고 삶은 이런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지시를 어.떻.게.든. 완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지시를 받지 않고도 가장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더 큰 일을 합니다.
(깊은산20140120)

눈 덮인 한라산 정상에서 발 아래 구름을 통해 내려다 보는 세상이 장관입니다.
그 구름 아래는 이미 봄이 와 있습니다.
누가 굳이 말을 해주지 않아도 압니다.
이런 날씨, 이런 장관은 쉽게 얻고 누릴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요.
감히 말하건데 1년 365일 가운데 며칠이나 될까요?
아니지요.
이렇게 한라산에서 이 만큼의 눈이 오고 기온이 알맞고 하늘이 파랄 수 있는 것은 백만년 만에 맞는 기적일 수도 있지요.
산 아래서 움추리고 앉아 있었다면, 장비가 없다고 기가 죽어 멈추어 버렸다면 만날 수 있는 비밀이고 보화입니다.
새벽 칼 바람을 맞으며 오르지 않았으면 햇살이 퍼지면서 다 녹아버렸을 눈꽃과 얼음꽃과 어울립니다.
앓고 앓아 알게 되고 아름다워집니다.
아, 삶이 그러합니다.
가 본만큼이 삶이고 선물입니다.
(깊은산20140121)

지금 내게 찾아온 물음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있고 왜 이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이 물어주어도 들리지 않고 그저 당연히 여기며 고집스레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올 수 있었던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잘 모르는 길도 가고 가는 중에 알 수 있고, 하고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물음이 찾아온다는 것은 또 다른 변화의 징조이고 이제 할 만큼 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뼈를 묻고 죽어보아야 떠날 수 있습니다.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고 다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무엇을 하든지 죽을 만큼 합니다.
지금을 다해서 삽니다.
(깊은산20140207)

살면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보다는 내 안에 있는 것을 얼마나 풀어내었는가가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순간 가슴이 꽉 차 오르는 감동은 그렇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 곁의 누군가에게 그가 하고 일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이고 응원입니다.
또 사실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주는 감동은 의식 수준에 따라 다르게 찾아옵니다.
그 일이 나를 나 되게 하고 있음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은 하나이고 생각은 둘입니다.
(깊은산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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