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lian.net)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3/12/29(일)
2014hppynewyear.jpg (350KB, DN:36)
권한  


오늘도 예수께서는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그 뜰의 주인이 자기들이라 여기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전에서 주인처럼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예수의 모습이 못마땅했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엎는 것에 화가 났겠지요.
예수는 그들의 눈에는 비천한 신분에, 무식한 촌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의 주인이셨습니다.
자기가 사는 땅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분이셨지요.
이 예수께서는 내가 오늘 거닐고 있는 나의 성전에 또 함께 계시고 같은 물음을 듣고 대답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또 어디를 거닐고 있습니까?
지금 그 성전으로 함께 들어가 봅니다.
캐나다 토론토인가요?
은혜 양로원인가요?
정말 참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예수와 함께 거닐고 있는 그 자리는 어디일까요?
장자춘몽이라고 하지요.
장자가 꿈에 나비를 보았는지, 나비가 꿈에 장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고 계셨습니다.
성전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성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에 성전에서 ‘내 아버지 집에 내가 있다’고 하셨고, 지금도 성전에서 기도하고 생명을 살리고 속죄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눈에 보이는 이득만을 챙기는 사람들을 꾸짖고 내어 쫓으셨지요.

부모의 눈에는 자녀들은 자기 집에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열두살에 그 집에서 나와 성전에서 진짜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게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 아버지를 만나는 거지요.
그래야 성전이 성전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성전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하신 일은 성전을 성전되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오늘 고향과 친척과 아비와 본토를 떠나 이곳 캐나다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의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하는 일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나의 성전은, 내가 살아가는 곳, 내가 일하는 곳,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입니다.
그런데 주인으로 살지 않으니 힘들고 지겨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여기에 들어와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 때처럼 나에게도 똑같이 묻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사람들은 다리를 겁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내 스스로 시비를 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하는지, 누가 이런 일을 하게 했는지, 무슨 권한으로 내게 이렇게 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도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들의 다리를 걸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믿음의 언어로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이 주지 않았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지금 내 일을 하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내 성전의 뜰을 거니는 것은 하늘이 주신 권한입니다.
그 누구도 시비할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

광야에서 야곱은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신데도 몰랐다는 것을 알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예전의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없어 두려우면 파괴로 가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두려움은 창조로 갑니다.
참 나로 살지 못할 때의 두려움은 죽음의 위기이지만 참 나와 함께 서 있을 때의 두려움은 삶의 용기와 설레임의 기회입니다.
알면 사랑이고 감사지만 모르면 무서움과 원망입니다.
그래서 이제 돌베개가 기둥이 되어 벧엘, 하나님의 집으로 변합니다.
(깊은산20131222)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줄곧 길을 걸어서 하란에 도착합니다.
돌베개를 베고 자다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만 광야의 길을 홀로 걸어야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뀌었지요.
두려움과 원망의 의식에서 임마누엘의 평화와 사랑의 의식으로 올라간 야곱의 걸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눈이 새로워지고 사람도 새사람이 된다고 하지요.
원래부터 늘 밝은 세상이었는데 혼자 생각에 빠져 깜깜한데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알면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어쩌지 못합니다.
(깊은산20131223)

야곱은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을 만나기 위해 우물가에서 사람들에게 묻고 묻다가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물으면 길이 쉽게 열립니다.
모르면서도 묻지도 않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묻는 만큼이 그 사람입니다.
당연한 것도 물으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지요.
야곱은 그렇게 물어 라헬을 만나게 되니 그 라헬이 야곱의 사랑이고 생의 또 다른 목표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묻는 물음을 나도 묻는다는 것입니다.
(깊은산20131224)

야곱은 하란으로 아내를 맞으러 왔습니다.
가나안의 여자들은 눈에 보이는 감각 세계에 사는 에서의 삶이라면 하란의 여자는 본질을 추구하는 내면의 삶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헬을 맞는 것은 예전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는 성탄입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홀로 노숙하며 돌베개를 베어야 하지만 하늘로 가는 사닥다리와 함께 가니 오히려 가벼운 길입니다.
그렇게 하란에 온 야곱은 왜 이곳에 왔는지 잊지 않고 물음을 통해 라헬을 만나고 라헬의 입을 맞추고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울 수 있습니다.
울음은 삶을 다시 깨어나게 합니다.
내 사랑 라헬을 만나는 일은 울고 울어 울음을 다해 가슴의 응어리와 그리움을 다 풀어내는 일입니다.
(깊은산20131225)

내 사랑 라헬을 만나면 또 나를 속이고 이용하는 라반도 만납니다.
견성수도, 거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부터입니다.
야곱은 라헬만을 위해 왔지만 또 지나가야할 길이 있기에 그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성탄이 그렇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는 라반을 지나야 합니다.
(깊은산20131226)

라반의 제의로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칠년 동안 일하기로 합니다.
그 칠년은 꽉 찬 햇수이니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고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칠년이 마치 며칠같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라헬을 얻는 길이 지루하고 힘들다면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사랑입니다.
칠년을 며칠처럼 사는 짜릿함이 사랑입니다.
(깊은산20131227)

야곱이 칠년을 며칠같이 일하고 라헬과 혼인을 하였는데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였습니다.
라헬을 위해 다해서 살았는데 깨어보니 라헬이 아닙니다.
아들을 위해 다해서 살았는데 깨어보니 아들이 아닙니다.
남편을 위해 다해서 살았는데 깨어보니 남편이 아닙니다.
삶은 그렇게 되도록 잘되어 있습니다.
뉴욕을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 막상 뉴욕에 서 보니 그 뉴욕이 아니지요.
뉴욕이 내 기대와 다름을 아는 순간 뉴욕은 토론토고 서울이고 강진이 됩니다.
내가 사랑한 라헬은 없고 칠년을 며칠같이 여기며 사랑한 나만이 있습니다.
라헬도 레아도 다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깊은산20131228)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