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chollian.net)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3/11/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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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그리고 그 중심인 성전에 들어가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형을 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부활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니 문제고 힘듭니다.
죽어 보아야지요.
아직도 살아있기에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강물에 떠가는 빈배는 부딪혀도 다툴줄 모릅니다.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사람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다투는 거지요.
산을 오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이들도 있지만 함께 산행을 같이 하는 이들의 가슴과 마음을 만나지요.
산에 오르면서 많이들 힘들어 합니다.
죽겠다고,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짜증내고 화내고 울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압니다.
그렇게 아우성하는 한 그것은 진짜 힘든 게 아니라고요.
정말 힘든 사람은 힘들다는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조금만 더 가면 그 힘듦을 넘어서 산과 자기를 만나는 ‘산의 경험’, 산에 녹아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나는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예루살렘,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오늘 여기서 죽는다면 부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자, 예수께서는 왜 성전에 들어가셨을까요?
성전이 성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거기서 팔고 사며 자기 욕심을 챙기고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가로채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 경제활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지요.
당시 성전 앞에서 일어난 일은 멀리서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이 예물로 바치는 양과 소 등을 가지고 올 수 없어서 성전 앞에서 구했는데 터무니 없는 바가지를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정성껏 흠 없는 제물을 어렵게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은 도리어 그것을 트집 잡아 거절하고 미리 짜고 표시해 놓아 파는 제물은 통과시켜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백성들만 곤란해지고 있었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을 ‘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대낮, 사람들이 보는 한 가운데서 상과 의자를 뒤엎고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나서서 제지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의 위력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동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가고 있었지만 예수로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들어가신 성전은 어디입니까?
오늘 나의 예루살렘, 오늘의 성전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곳이 아니지요.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오늘의 성전은 바로 ‘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께서 찾아오신 성전, 들어오시는 곳도 바로 ‘나’이지요.
나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곳인데,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혹시 내 안의 모습도 그렇게 내 욕심대로, 생각대로, 내 고집대로 나를 망가뜨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고 팔면서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럽고 음모와 협잡과 뇌물로 혼탁해져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는 하지 않고 그런 염려와 근심만 하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과 뜻을 비우는데서 시작합니다.
소란스럽고 혼란한 내 생각으로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품을 때 기도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게 사는 한 내 생각과 기준에 합당해야 감사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내 생각과 기준이 없습니다.
다 들을 수 있고,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틈새와 여유가 있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 성전입니다.

(마가복음 11장)

깊은산에서 온 편지

며느리를 구하는 아브라함의 조건은 고향 땅에서 떠나올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각만 하고 앉아 있으면 거기까지지만 한걸음 옮겨 떠나보면 서 있는 자리가 보이니 변화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된 것이고 용기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그거 하나면 충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쉽습니다.
(깊은산20131117)

주인의 며느리를 찾아 길을 떠나는 종의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의심과 염려 속에 주님께서 천사를 앞서 보내어 길을 인도하시길 구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을 터입니다.
그리고 황혼녘에 우물가에 앉아 드리는 그의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메고 나오는 것을 마주하고 말없이 일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가 기도하지 않았으면 리브가를 보고도 몰랐을 겁니다.
막막한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며 주어진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나서 말없이 지켜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천사를 앞서 보내 나의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깊은산20131118)

리브가는 때에 맞추어 물동이를 메고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자였습니다.
낯선 노인이 물을 달라고 할 때 외면하지 않고 ‘급히’ 물동이를 내려 손에 받쳐 들고 물을 마시게 하고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물을 더 길어와 낙타들에게도 실컷 마시게 합니다.
그렇게 리브가는 땀 흘려 자기 할 일을 하면서도 섬길 줄 아는 여유와 너그러움, 지혜와 순발력을 가지고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리브가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감돕니다.
그런 그에게 약속이 있습니다.
(깊은산20131119)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하나님을 만났듯이 리브가도 낯선 노인을 대접하다 이삭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뜻밖에 찾아오시고 운명은 우리 삶에 개입합니다.
지금 어떤 태도와 습관으로 살아가느냐가 나의 하루를, 나의 내일을, 나의 한 생을 만들어줍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만큼 기회와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 내 덕입니다.
(깊은산20131120)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과 오빠 라반도 리브가를 떠나보내며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니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마치도 자기가 하나님인 듯이 판단하고 분별하고 정죄하고 사니 힘이 듭니다.
사람으로서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일로 맞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는 것입니다.
(깊은산20131121)

“예! 가겠습니다.”
리브가는 열흘만이라도 함께 있자는 부모와 형제의 요청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선택합니다.
지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열흘 더 있는다해 달라질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없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아내를 중환자실에 두고 6개월만 더 같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내게 하나님은 1년하고도 6개월을 너에게 주었는데 뭐했냐고 물으셨습니다.
있을 때 잘해야지요.
그러니 앞으로 잘하지 말고 지금 잘 합니다.
“예!”
(깊은산20131122)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이삭이 혼인한 후에 다시 그두라를 아내를 맞이합니다.
백세에 기력이 쇠해서 이삭도 낳을 수 없다고 하던 그가 칠십 오년을 더 살고 아들 여섯을 더 낫습니다.
사실을 보지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멈추면 거기까지입니다.
이스마엘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삭을 낳고 이삭에 머무르지 않으면 여섯 아들을 더 낳을 수 있습니다.
이제 끝이라 여긴 곳이 사실은 새로운 출발의 자리입니다.
산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깊은산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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