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san@sanmul.net) 2001/10/17(수) 23:33

[2001.10.15] 성삼재-노고단-임걸령-노루목-반야봉  여기 예쁜 화분 하나 있습니다. 가을 햇살이 너무 좋네요. 아침에 빨래 잔뜩해서 옥상에 널러 올라갔는데, 아 그 눈부심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빨래 널러 올라가서 하늘만 보고, 햇살만 보고 왔습니다.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 이렇게 햇볕 한 줌, 바람 하나, 들리는 소리 하나를 소중한 '선물'로 받아 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1. 길은 있어도.... 지난 월요일 또 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산이 그립고, 산에 가서 힘, 기운을 빌리고 싶어서였지요. 이제 유학, 더 공부하는 것을 잠시 접고, 임지를 다시 찾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임과 생각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하는데, 생각과 욕심과 계산이 앞을 가려서 다 내려놓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잘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가? 이런 과정을 통한 인도하심은 무엇인가 잘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잘 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생각 천사들과 좋은 이웃들의 안내를 받아 내 길을 잘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잘 보니 모두가 돕는 천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 식구들, 도와주시고 연결시켜주신 분들, 한 분 한 분...... 그리고 여기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처지, 상황들까지도요. 다시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서 시간이 많은 파트타임을 할까, 이왕에 눌러 앉는 것 전임목회를 할까 고민이었습니다. 파트타임을 하면 시간이 많아 공부도 하고, 수련회도 계속할 수 있고, 무엇보다 홈페이지를 더 구체적으로 섬길 수 있어서 마음이 많이 당겼습니다. 그렇지만 전임목회를 하면 시간이 없는 대신에 교구를 담당하면서 심방하고, 사람을 만나고, 설교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섬겨갈 수 있는 '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두가지를 놓고 물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내 안에 교구목회를 하고 싶은 열망이 보였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고,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보였습니다. 내게 이 일이 더 필요해서 이곳에 남아 있는구나, 그렇게 보면서 주어진 전임사역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번 산챙은 참 힘이 들었습니다. 주일 밤 12시에 사랑하는 아침볕님과 함께 출발했는데, 밤새 운전을 하며, 이야기하며 가서 차에서 잠깐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는 산행을 계속했으니 우선은 체력이 딸렸습니다. 그래도 산의 기운에 힘입어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장수 장군휴게소에 도착하니 4시 30분이었습니다. 중간에 함께한 분의 언니 댁에 잠시 들러서 쉬다 왔지만 빨리온 셈이었습니다. 6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성삼재로 가기로 하고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밤새 하늘에 별들이 쏟아졌는데, 동쪽으로 실날같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초생달인지, 그믐달인지 계산이 되지 않았지만, 훤해 오는 동쪽하늘로 떠오른 달이 참 신비로웠습니다. 장군 휴게소 밑에 있는 24시 순대국집 문을 두드려 6시에 아침식사를 푸짐하게(?)했습니다. 함께한 아침볕님의 기지로 아줌마에게 주먹밥을 부탁해서 산에 싸가지고 올라갈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지요. 그렇게 식사를 하고 88올림픽 고속도로를 타고 인월과 뱀사골을 거쳐서 성삼재에 오르니 7시 30분, 한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10시에 노고단 예약을 했으니 시간이 많이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산장까지 40분쯤 걸렸습니다. 산장에서 노고단 정상이 열리는 시간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노고단 고개에 올라 둘러보고는 정상에 올라갔다 오니 10시 30분이었습니다. 그 길로 내 달려 임걸령 샘터까지 12시, 다시 반야봉에 오르니 12시 30분이었습니다.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까지 빠른 걸음으로 2시간 정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10년만에 열린 노고단 정상에 올라보니 보이는 세상이 다르더군요. 10월 31일까지 개방을 하니 인터넷 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오르면 정상을 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리산과 만난지 10년이었지만 늘 정상을 지나쳐 노고단 고개로만 산행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올라갔는데, 보이는 세상이 달랐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조금인데, 하늘과 땅, 강과 들판이 달라 보였습니다. 특히 남벽으로 올라서서 바라본 섬진강은 세상에나, 그림같은 수려함으로 탄성이 온 입에 가득하였지요. 그렇구나... 이렇게 조금만, 조금만 올라서면 보이는데..... 노고단을 지나 임걸령 샘터와 노루목으로 해서 반야봉까지 길을 잡았습니다. 반야봉은 한번도 올라보지 못하고 바쁜 종주길에 스쳐 지나갔던 지리산의 3대 주봉의 하나이지요. 그 반야봉을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이 두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는 그 산..... 넉넉한 품에 안겨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억새가 한창인 돼지평전도 지났고, 아직도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산책길과 같은 북쪽 능선도 거쳤습니다. 걷다가 바라보이는 남쪽 능선에 불타는 떨갈나무 단풍은 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신의 정원과 같은 예쁘고 고즈넉한 길이 지친 걸음을 쉬게 해 주었습니다.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입니다. 하지만, 몸에 기운이 많이 달려 참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갈 때는 산에 있는 힘으로 달려 올랐는데, 돌아오는 길은 참 어려웠습니다. 서너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데, 한 걸음도 떼기가 어려운 겁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인가? 한달이 넘게 감기로 지친 몸이 허해서인가? 아직 내 마음에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숙제를 가득히 안고 있어서인가? 그런 물음을 가지면서 나를 잘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때 문득 다가온 생각천사... 라크마... 아, 길은 있어도 길을 걷는 것은 내가 아니구나. 산에 오고 싶은 욕망과 열정, 그리움으로 왔는데, 그리고 걸음을 옮겼는데, 한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산이 안아 주지 않으면, 산이 품어주지 못하면 정말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너시간을 가지 않으면 내려설 수 없습니다. 누가 데려가 주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갈까.... 산이 안아주고 보듬어 주면 갑니다. 산이 품어주는 그 느낌에 젖으면 서너시간이 아니라 열 몇시간도 넉넉히 걸을 수 있는 것이 지리산입니다. 그러나 산이 안아주지 않으면 한걸음도 십분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구나.... 내 길, 내 목회도 그랬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할 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어 하는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품어주고, 내 길이 나를 품어주고, 내 목회가 나를 품어주고, 나의 교회가 나를 품어주어야 갈 수 있는 걸음이었습니다. 길은 있어도 길이 나를 품어주어야 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ego)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self)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길 안에 있는 나입니다. 그러니 나의 염려와 걱정,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산의 품에 의지해서 발걸음을 신명나게 옮기듯이 그 품에 의지해서 신명나게 나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신비 안에 있습니다. 2. 가장 알맞은 때에 가장 적합한 일로.... 이제 가장 알맞은 때에 가장 적합한 일을 내게 주셨습니다. 내가 만나는 교인을 가장 행복한 교인되게 하겠습니다. 내 설교를 듣고, 내 심방을 받고, 내가 돕는 그 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 되게 하겠습니다. 정성을 드려서, 사뿐히, 주의깊게, 다정하게, 공손하게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겠습니다. 가장 알맞게 내게 오신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혜, 그 분의 꿈을 잘 받들어 살아가는 행복한 목사가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면 더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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