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깊은산 (san@sanmul.net)
2001/10/1(월) 19:23 | |
 [2001.9.13~14] 백무동-천왕봉-백무동 게을러서리..... 캐나다 비자가 보류되고 마음 상하여 이리저리 눈치보면서 방콕하고 있었는데, 그 사정을 아는지 몇분이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도 가기 하루전 날인 수욜에.. 지리산에 가자!! 정말 그저 끌려가는 느낌뿐이었습니다. 산에 가도 마음이 편해야 가지. 그냥 집에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저야 저지만 아내와 집안 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처지인지라.... 하지만 의외로 아내가 흔쾌히 다녀오라 했습니다. 또 님들의 권유가 간곡해서 그저 내가 좋아하는 곳 안내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지난번 홀로 산행을 한 이후로 담엔 꼭 아내와 함께, 한결이랑 다녀오겠다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참 미안했습니다.  과천에서 일행과 만나 출발한 것은 목요일 아침 9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지만, 함께한 님들과 어울리다보니 그 들뜨고 유쾌한 분위기에 한껏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길에 티없이 맑은 하늘이 참 감사했고, 마음도 덩달아 높아졌습니다. 좋은 말씀, 나눔으로 함께해준 민들레님께 참 감사하고, 길을 열여주시고 온갖 수고로운 준비를 맡아주신 둥굴레님, 추억님, 또 멋진 데이트를 마련해준 참붕어님께 참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열린 제 마음은 어느덧 산에 가까워짐을 느낄수록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산에 가면 의례느끼는 것,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그 물음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내 역할들에 대해, 내 느낌에 대해, 내 아픔과 곤고함들에 얽매이지 않는 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참 소중한 은혜이지요. 그래서 산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내 것도 아닌 것들에 잔뜩 매여서 살아가니 이 어찌 어리석은지요. 그렇게 가다가 장수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장군휴게소에서 만나는 점심 진지를 들었습니다. 무주에서 장수가는 국도에서 88 고속도로 진입하는 길에 있는 휴게소인데, 음식이 푸짐하고 맛도 일품입니다. 그렇게 배를 든든히 하고, 88고속도로를 들어서서 인월을 지나, 백무동에 이르러 여장을 차려 산에 오르기 시작하니 3시경이 되었습니다. 늦어도 7시까지는 도착해야하는데, 거의 초보자들이라 내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나 혼자라면 넉넉한데, 해지기 전에 오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비장한 각오와 산에 흠뻑 젖어있는 님들의 모습, 1박 2일의 산행으로 그리 무겁지 않은 짐을 믿으며 올랐습니다. 예상외로 다들 산을 잘타 이번에도 홀로의 산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출발했지만 선두를 지키며 훌쩍 앞서서 늘 두배 시간의 간격을 두며 산행하였습니다. 그렇게 홀로 오르다 님들이 보이면 또 오르고 오르고.... 그러니 여유가 더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짐이 없어서인지 이번에는 하동바위에 40분만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참샘까지 30분, 참샘에서 망바위까지 1시간, 망바위에서 장터목까지 30분.... 짐이 없는 산행과 짐을 가진 산행이 참 다름을 결험하였지요. 내려오는 길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달 전의 강행군이 몸을 많이 회복시켜 준 듯합니다. 하지만, 그 속도가 같이 오른 이들의 속도의 배가 되어서 장터목에 다 도착하니 7시가 가까웠습니다. 성공이었지요. 올라오기까지 날씨도 쾌청하여 산행하기 딱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참샘 위 깔닥고개를 지나 이름한 신의 정원에 이르니 숨이 골라지고 마음이 편해지고 산의 넓은 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가이 맞아주는 산이 있어 늘 감사합니다. 하지만 산장에 가까워지자 날이 어둑해지면서 안개가 짙어지고, 결국 어두워지면서 빗방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망바위 위에서 앉아 쉬일 때에도 구름이 많이 시야를 가렸지만, 곳곳에서 춤추듯이 올라오는 구름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때때로 장터목 위로 열리는 파란 하늘이 신비롭기만 했구요. 이게 바로 선경이구나 마음 속으로 외치고 함께 춤을 추었지요. 충분히 휴식한 후에 함께 저녁을 지어 먹으면서 유쾌한 수다와 놀이로 기분좋은 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낼 천왕봉 일출을 보자고 다짐하면서.... 그런데, 내심으로는 천왕봉 일출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올라갈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었습니다. 날씨가 점점 심상치 않아졌기 때문입니다. 왠일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신경이 잔뜩 날카로와 밤새 뒤척이다 서너시 경에 잠을 깨서 밖에 나와보니 여전히 빗방울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야속하게..... 날씨는 더 어두워서 산을 오를 엄두가 나지를 않았습니다. 길은 많이 익숙했지만...... 또 산장을 가득메운 대부분의 등산객들도 천왕봉행을 포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도 혼자였으면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 산행하는 이들이 있어서 염려되는 것은 천왕봉을 포기했다는 실패 내지는 좌절을 맛보게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속에 칠흙같은 어둠에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해드랜턴 하나 달고 오른 산길이었는데, 조금씩 날이 밝아오면서 통천문 즈음에는 랜턴 없이도 걸을만 했습니다. 일출을 보려면 조금 더 일찍 올랐어야했는데,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고간 등산화가 고어택스라스 그런지 오를 때까지는 빗물이 신발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오른 이들은 양말안까지 흠뻑 물이 고였고, 내려오는 길에는 빗줄기가 더 거세져서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어둠 속에 고개를 내면 노랗고 파란, 보라색의 야생화들 빗를 흠뻑 맞은 천왕봉 오르는 경관은 참 신비롭고 예쁘고 아릅다웠습니다. 힘이 들었고, 모험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올라갔다 오니 마음은 뿌뜻하고, 몸은 상쾌하고, 정신은 맑았습니다. 비오는 길이었지만 왕복 2시간이 걸렸습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사이의 길을 자주 올랐는데, 이번에 오르면서 길이 참 예쁘고 하나님이 잘 가꾸어주신 정원같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습니다. 산이 거기 있음이 참 고맙고 행복합니다. 언젠가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을 오를 때 보았던 그 신비로움이 다시 조금 느껴졌습니다. 그 때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으로 내달아 오를 때 그 곳의 분위기와 운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것이었지요.  천왕봉에서 내려오자 산장에서는 호우주의보가 내렸다고 어서들 하산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7시부터 천왕봉 오르는 길에는 등산금지 안내문이 붙었구요. 혼자였으면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텐데 또 함께 하는 님들이 있어 가볍게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혼자서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또 함께라야 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으면 신앙과 통찰이 더 깊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않으면 또 마찬가지겠지요. 교인이 있어서, 독자가 있어서, 일이 있어서 내가 되네요.... 참 감사합니다. 정말 자알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세석까지의 길은 포기하고 바로 하산해야 했습니다. 잠시 내려설 때 하늘이 환하게 열려 사방에서 밀려오는 구름들의 잔치에 탄성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은 비오는데로의 장쾌함, 구름의 향연이 주는 아득함을 경험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그렇게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편해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백무동 주차장에서 일행을 그렇게 또 두시간 기다리는 12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구례 지리산 온천으로 가서 젖은 몸을 닦고 피로를 풀고 올라왔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많이 떠올린 것은 지리산이 나에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한 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하면서 내 스스로 더 깊은 영혼의 울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은 참 나의 벗이고, 스승이고, 나를 낳아준 또 다른 어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리산이 없었던들 오늘의 나는 어디에 있을지 막막함을 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 나의 위로, 피난처이었고, 사람과 세상에서 다 밀려났을 때 나를 안아준 품이었습니다. 처음 지리산을 오를 때는 역사와 한과 이념과 사상으로 지리산을 만났습니다. 태백산맥을 처음 읽었을 때 오로지 염상진만이 눈에 들어오던 것과 같았았습니다. 머리와 가슴에는 역사와 이념만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군대 다녀와서 지리산에 오르기 위해 태백산맥을 다시 읽으니 김범우가 들어오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 헉헉되는 나와의 싸움을 하면서도 빨치산의 고뇌와 역사, 숭고한 의지, 그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지리산과 처음 만나는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르고 또 오를수록 산은 사람을 보여주었고, 삶을 가르쳐 주었고, 믿음과 희망, 사랑을 알려 주었습니다. 어느날 산을 오르는 내가 있었고, 어느날은 산이 벗이 되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또 마침내 하늘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그런 순간에 나는 세상과 나를 분리할 수 있었고, 존재와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생각과 느낌의 차이, 그 일과 느낌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내 벗이고, 선생님이고, 나를 나되게 해준 또 다른 어버이입니다. 참 감사한 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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