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의 맑음. 학교 올라가는 길이 너무나 싱그럽다. 우거진 신록을 대하노라면 어느새 시간이 그만큼 흘러 버린 것을 느끼고 있어. 이제 너와 결혼하여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낸 지 백일이다. 어떻게 보낸 시간들이었나? 그렇게 기대하고 그리던 시간이었는데 그것이 세월의 늪이 되어 일상이 되어 그리움이 복받치는 함께 있고 싶음이 묻혀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 진다. 신혼의 단꿈, 기쁨의 시간이 너무나 짧았고 이제 생명을 잉태하여 몸 속에 아이를 키우며 힘겨워 하는 너의 모습을 대하노라면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너의 말대로 그것이 기대하던 소중함이기보다는 설마 설마 하던 주저함이었기에 그 미안함이 더욱 나를 채찍질하는 게다. 그래서 너에게 아이를 잘 키워 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너에게 평안과 안정이 있기를 그렇게 바라지만 난 그것을 원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더욱 앞선다. 그간 너의 많은 질책들이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난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리고 너와 나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감사함으로 감내 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짜증이 되고 마는 것을 느끼며 당혹스러워진다. 다정한 말 한마디,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처음 만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고백하던 그 벅찼던 소중함으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너무나 현실은 막막한 거다.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음이고, 많은 말들, 많은 기대들, 희망들을 나누어 갖는 것인데,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외로움으로 온 몸 사무치는 절절함으로 너를 향하던 나의 감정(!)이 스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게 산다는 것인가 보다. 연인으로 사랑함과 부부로 사랑함은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는 현실이 있고, 삶이 있고, 책임이 있고, 무게가 있다. 연인으로 사랑함이 ‘이데아’라면 부부로 사랑함은 사람 살아가는 ‘실천’이다. 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영원히 너를 나의 연인으로, 나의 가슴에 불을 피우는 생명의 근원으로, 내 속에 나를 보여주는 거울로 가지고 싶다. 결혼 백일, 오늘 다시금 나의 흩어진 모습을 추스리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참회하듯이 이제 나의 아내, 지숙에게 사랑의 고백을 참회로 바치며 새로움의 다짐을 한다. 더 성숙하고 깊은 사랑으로 나를 가꾸며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삶이라는 과정, 사람에게 주어진 업의 길 속에서 사랑을 함이 우리에게 놓여 있다. 먹을 것을 구하고, 아이를 키우고, 이 땅에 살아가는 부름 받은 소명을 재확인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그 길 속에서 사랑을 구하는 것이다. 매일 밥 챙겨 주고, 청소하고,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 대단한 것 마냥 투정을 부렸던 나를 용서해 다오. 너의 말대로 생색내었던 나를 용서해 다오. 이제는 그러한 것보다는 진심으로 생 속에 깊이 내려진 꿈과 부르고 싶은 이름을 기억함으로 사랑을 키워 가마.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그 아이를 키우는 책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생명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고 생을 한 단계 뛰어 넘는 거다. 옛 현자들은 나이 서른이 되면 출가했다고 한다. 처자와 집을 버리고 진리를 찾는 구도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셨던 가르침과 진리에 이르는 길은 구체적인 삶과 인간이 얽혀 살아가는 역사 가운데서 였다.
나의 지숙아, 이제 우리 서로 격려해 주자. 서로를 다독거리고 아프게 하지 말고, 힘을 주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만이 우리의 삶을 영원하게 해 줄 수 있는 끈이 되는 거다. ‘늙어 가는 아내’라는 황지우님의 詩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생각처럼, 나중에 정말 나중에 우리 잘 살았지,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살자. 우리에게 태어날 아이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좋은 본이 되고 희망이 되는 사랑을 만들어 가자. 사랑을 생각하고, 결혼을 그리며 함께 꾸었던 꿈이 있잖니? 노래가 있잖니? 결혼을 하고 난 네게 기쁨과 힘이 되기보다는 고통만을 더 안겨 준 기억밖에 없다. 그런 내가 밉다. 그래서 난 기도를 시작했고, 기도 가운데서 우리가 바른 신앙과 고백 속에서 좋은 사랑과 좋은 길,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이 될 수 있기를 빌고 있다. 결혼 백일 다시 한번 우리 삶을 믿고, 서로를 새롭게 하고 사랑과 꿈을 이루어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