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0121 : 열세번째 편지(부치지 못한 편지)
사랑하는 나의 지숙에게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지숙아, 드디어 사랑이 결혼으로 만나고, 열흘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과 만물의 축복을 받으면서 하나가 된다. 비록 우리 둘만의 것이었던 것이 모두의 것으로 공유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꿈꾸어 왔던 것인데,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나니 실감이 나지를 않고 도리어 두려워진다. 사실 눈물겨운 시간들이었다. 뼈를 깍는 인고의 고통이 있었고 숨쉴 수 없는 환희의 순간들이 넘쳐났었다. 그 소중함들을 가슴에 안고 즐기고 만들어 왔었는데 이것이 또한 현실과 형식이라는 틀 속에서 의미가 희석되지 않고 늘 긴장과 떨림으로,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일상이 되지 않는 삶의 생명력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도한다.
사랑이란 밥을 먹지 않아도, 추위에 떨어도 잠 한숨 자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가 꿈꾸고 기다렸던 사랑은 우리네 초라한 사람들의 삶을 지켜주는 힘이고 빛이다.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수 있는, 무엇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기쁨으로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다. 너와 나의 사랑과 만남이 그러한가? 나에게 너는 그런 빛이 되어주었는데, 난 너에게 그런 빛이 되어줄 수 없는가? 이제와서 그런 되돌아봄을 갖는 것은 너를 처음 만나고, 널 알아가던 그 시간들을 이제 결혼으로 만나는 우리의 관계에 투영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넌 나에게 생명이었다. 애인보다는 친구가 좋고, 남자보다는 동역자가 좋다던 너를 내 연인과 내 여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제 나는 그 책임을 져야하고, 너도 그 일부를 감당해야 한다. 지숙아, 우리 잘 살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함께 신뢰하며, 함께 사랑하며, 서로를 배려해주고 존중해 줌으로 그 힘을 잃지 말자. 우리의 생에 그 힘을 잃고, 삶과 현실의 무게에 눌려 지쳐버리게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빛을 잃고 만다.
요 며칠 결혼 준비에 지쳐가는 너와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만나 이야기하고 얼굴 맞대는 모습보다는 주변의 것들에 휩싸이는 너와 나를 보면서 그런 우려가 든다. 그렇게 현실의 벽이란 무거운가 보다. 우리는 다르게 살자. 너와 나라고 해서 별다르겠냐만 사랑으로 살아가고, 이 땅에 참 공동체와 참 교통함이 있음을 너와 나의 삶으로, 사랑으로, 꾸린 가정으로 보여주자.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지 남과 녀의 만남과 성과 사랑은 우리네 사람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신의 선물이라고. 그것을 잃게 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과 사람들의 사랑과 은총과 희망을 간직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는 거다.
억울함.
고통.
시련
연단.
나이서른에 우리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에 어떤 뚯을 지닐까
저 거친 들녘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에 어떤 뜻을 지닐까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우리들이 지나온 그 시간들이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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