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지숙에게

사람의 마음을 애처롭게 만들려는 듯 정초부터 겨울비가 내리더니 사방이 꽁꽁 얼어버렸다. 바람을 맞으며 계단에 서있으려니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겨울들기 전 앞집 감나무에 외롭게 달려 있던 감 몇 개도 어느새 참새들 먹이가 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진득하게 앉아 신정연휴를 다 보냈다. 잠시 역곡 고모네 집에 인사드리러 간 것 말고는 말이다.
넌 어떤 기도와 마음으로 정초를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난 늦잠 실컷자고, 읽고 싶은 책 읽고, 명상도 하면서 그간 분주했던 일상 속에 놓쳤던 것들을 되찾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사람들하고 정신없이 어울렸을 텐데 지금은 철저하게 혼자다. 말끔히 주변을 정리하고서 여유롭게 있으니 사람들 생각이 난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맞는 조용한 시간이다. 컴퓨터 하드 돌아가는 소리도, 자판 소리도, 모니터의 화려한 색조도 없이 정돈된 책상에 앉아 은은한 스텐드 조명에 너만을 생각하며 밤을 맞고 있다. 못견디게 네가 그리웠는데 정성들이는 펜끝과 나의 기도가 그 그리움을 승화시키는 것 같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다가 문득 역사를 사랑한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널 사랑하고 품으란던 상선이형 말이 떠올랐어. 그래, 참 오래간만이다. 내가 역사를 사랑했던 것,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무한히 솟아나는 열정과 떨림이 있었던 기억은 참 소중한 것이다. 사랑함을 잃지 않고 사는한 희망이 있다. 그 무너질듯한 고개들 속에서 그 소중함을 상실하고 살아왔다. 역사를 사랑함은 이제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라 미래를 건설함이다. 몸바쳐서 사람이 피흘리며 자유와 정의와 사랑을 이루는 그 길에 서 있듯이 흘러버리는 일상과 삶의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되물으며 참 사람답게 살련다. 다시 그 길에 접어들련다. 하나님과 함께, 너와 함께. 너랑 몸부딪히며 살면 아마도 이러한 고요함이 많이 상실되겠지만 보다 큰 삶은 그렇게 함께 살면서도 일구어 가는 고요함에서 있으리라.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한 해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면서도 아직 날 사랑하지 못한다는 너의 억울한 항변이 연락조차 없는,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너의 모습에서 들리는 듯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의 자유로움이다. 지난 여름, 가을, 겨울, 설교학, 북한돕기, 한총련사태, 그리고 지금의 너와 나. 어쩌면 아둥바둥 나의 힘으로 조급하게 걸어온 길같지만 그 모두가 주님의 예정하심 속에 이끄심이었따. 그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이 감사하고, 이제는 조금 더 여유롭게 너와 나의 길을 믿으며 받아들여 살고 싶다.
지금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영성인 것 같다. 나의 영성은 역사의 현장에서 치고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고, 꿈을 얻고 힘을 누린 것인데, 그 근원을 막혀 버린데서 오는 고통이다. 그냥 허겁지겁 살아오기에 급급했던 게지 이제 나의 신앙과 믿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길은 그 영성을 되찾는 거다. 올 한해, 그러한 내가 되도록 기도하고 지켜봐 주지 않으련? 삶의 여유와 돌아봄 속에 순간 순간 꿈의 자리를 되물으면서 의미를 얻고 싶다. 우리 힘차게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를 살아가자.

1997년 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