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20:19~23 (eastsain@chollian.net) ( 120812)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2/8/18(토)
주일 낮예배 : 너희에게 평화가  


본문 :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제목 : 너희에게 평화가
일시 : 2012년 8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울고 있던 마리아는 몸을 굽혀서 빈무덤에서 천사를 만났지요. 그리고 그 천사에게서 물음을 받습니다. 왜 울고 있지? 돌아보니 우는 이유가 어이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울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정신차려보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울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있는 그 분을 찾아 나서면 되는 거니 말입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니 예수님은 뒤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반가워 하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하시고, 대신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지요.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전의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야 더 깊은 곳,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숨가빴던 여름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마리아의 물음을 묻습니다. 나는 지금 왜 울고 있고 누구를 찾고 있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물으며 돌아보며 무덤 앞의 마리아가 되어 주님을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앞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고도 두려워 숨어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에게 있었던 다음 이야기입니다. 19절을 읽어 봅니다. "그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를 하셨다."(요20:19)
주간의 첫 날, 사흘이 되는 날까지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혹독하고 길었던 사흘이 지난 후 무덤의 문이 열려 예수님은 살아 나셨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만을 보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예수님은 죽었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 살아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집으로 들어가 두려움에 빠져 문을 모두 닫아걸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왔는데 이제 그들이 무덤에 있습니다. 큰 돌덩이로 무덤을 막고 꼭꼭 숨어 있으니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문을 열어야 사람도 들어올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변화와 성장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영어를 잘할 수 없다는 내 생각에 빠져 있으면, 나는 아프다는 경험과 판단에 갇혀 있으면, 그렇게 문을 닫아 걸고 거기서 나오지를 못하는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자들은 무엇이 무서웠을까요? 예수님처럼 죽게 될까 무서웠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죽어보지도 않아 죽음을 모르니 죽음이 무서울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실체도 없는 것에 묶여서, 그럴 것이라는 귀신에 들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서웠던 것은 자기네들이 유대사람을 무서워하고 있고, 죽음은 무서울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무지입니다. 몰라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알면, 깨어나면 모두가 사랑이고 선물입니다. 모르니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는 것이지요. 문을 내 생각과 내 틀로, 내 고집으로 꼭꼭 닫고 있으니 그 무엇도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사랑이 와도 만날 수 없고, 기쁨이 와도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그러니 평화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그 문을 열고 들어 와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닫아 걸어둔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그와 함께 죽음이 없이 있는 참 나를 만나) 오늘 내 생각으로, 내 두려움으로 닫힌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다는 생각, 죽음이 문제라는 생각의 문이 열리면 죽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간은 없고 영원만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지요. 그렇게 내 생각과 내 틀을 깨고 들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로 인해 성숙하여 변화하는 것입니다. 차원을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전하시는 말씀이 바로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그렇게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사는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지금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를 받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는 하나입니다. 지금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평화가 없고 다툼과 미움이 있다면 예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벗어나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 삶에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수치심과 두려움의 의식 수준에서 평화와 사랑의 의식으로 성숙하여 높아져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이어지는 20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요20:20)
자, 두려움으로 꼭꼭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와 평화를 비신 예수는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평화를 비신 예수의 그 두 손에는 못이 박혔던 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있지도 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꼭꼭 숨어 있는 제자들은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프고 힘이 듭니다. 상처받고 고통 중에 어디로 가야할지 서럽게 신음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두려워서 화가 나서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있는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시는 예수님도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으셨습니다. 나 혼자만 아프고, 나 혼자만 힘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렇게 나의 가장 큰 아픔과 곤경에 함께하고 계시고 나를 돕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화를 비신 예수님에게도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었습니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고 두려움 너머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만나주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죽음이 없이는 영생이 없지요. 그렇게 우리 예수님께서도 나와 같이 고난받고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해서 고통받고 연약해서 상처를 받고 있지만 예수님도 고통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똑같은, 아니 더한 시간을 보내시고 이렇게 환하게 나타나셨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요? 기쁨의 함성이 일고 감격의 눈물로 서로 부둥켜 얼싸 안았습니다. 삶은 그런 것입니다. 무덤의 문이 열리면 그렇습니다. 빗장이 풀려 생각이 끝나는 자리에 이런 하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오늘 두려움이 가득한 우리네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이어지는 21절에서 23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20:21~23)
두려움으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는 그들에게 평화를 비시고 기뻐하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평화가 있기 위해서는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가 나를 보내었고 나는 누구를 위해서 사는지를 아는 것이지요. 자, 그렇게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이의 일을 하면 됩니다. Desire라는 말의 어원을 말씀드렸었습니다. 디자이어는 욕망인데 라틴어에서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욕망은 사실은 하나님이 디자인 한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지요. 얼마나 멋집니까? 그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러니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때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를 붙잡고 하나가 되어 사셨지요. 그것이 그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얼로 사는 것입니다. 깨어서 찾아온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뿌리를 내려 든든하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으니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고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우리는 그 '나'로부터 보냄을 입은 것이지요. 그런 존재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이 이 땅에 나타난 것이 사람, 나입니다. 그렇게 보내심을 받았으니 평화를 누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삶에서 누리는 평화가 그 증거인 것입니다. 평화가 없다면 돌아보아야지요.
창세기를 보면 처음 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평화를 비신 다음에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 숨은 바람이고 그 바람은 성령입니다. 그러니 보내심을 받은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로 사는 삶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용서가 됩니다. 용서하지 않아서 아니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듯이 용서가 나를 통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용서할 것은 나이지요. 나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지 않을까요? 용서하지 못해서 지옥을 삽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와 화해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나를 용납하지 못하며 사는 그보다 더 큰 지옥은 없습니다. 이제 나의 일을 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성령의 일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하면 천국을 삽니다. 사랑하고 사는 것이지요. 용서하지 못해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숨, 성령으로 사는 것은 용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나를 만나 나와 화해하고 나를 용납해서 나의 소질과 재능을 살려서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 참 사랑이지요. 용서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습니다. 내가 용서하면 다 용서가 됩니다. 평화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가 손에 있든 옆구리에 있든 그것은 상관이 없지요. 없는 척하지도 말고 그것을 인정하여 그대로 보고 기뻐하며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화가 없고 괴롭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영생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숨, 성령을 받아 평화와 용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두려워 꼭꼭 숨어 있는 저들을 찾아오셔서 평화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들 가운데 평화가 있게 하옵소서. 불어넣어주신 숨을 받아 성령으로 살게 하옵소서. 용서하며 살게 하옵소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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