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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삼상1:1~19 ( 120729)
2012/7/30(월)
주일 낮예배 : 한나의 꿈  


본문 : 사무엘상 1장 1절~19절
제목 : 한나의 꿈
일시 : 2012년 7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습니다. 사사는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왕을 대신해서 다스렸던 선지자였지요.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였고 어머니는 한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이야기는 사무엘의 시작, 아이를 낳지 못했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대로는 사무엘이 세상에 올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이 세상에 올 수 있게 되었느냐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세상에 온다는 것은 기적이며 선물입니다. 하고 싶어서도 할 수 있어서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세상에 온 것도 이곳 캐나다에 살게 된 것도 그렇게 우연한 것, 당연한 것이 아니지요. 내가 꾸는 꿈, 그것을 이루어가는 일 또한 그러합니다. 한나에게 아들이 문제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내가 이루어가야 할 생의 목표, 꿈이 그것이 아닐까요?

2절을 함께 읽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남편의 두 아내, 어떤 관계, 어떤 자리일까요? 엘가나는 기분이 어땠을까요? 상상해 보세요.
자, 일부 일처제니 일부 다처제니 그런 이야기이기보다는 사랑을 잘 주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되시는 분들, 사실 하나뿐인 남편의 마음도 얼마나 채워주기 어려우신가요? 또 남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뿐인 아내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데 두 명의 아내를 어떻게 사랑할까요? 복잡해지지요. 남친 여친도 그렇지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이런 문제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오늘 문제의 핵심은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고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 가장 잘 보는 것일까요? 언젠가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문제를 문제로 보는한 우리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어지면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굼벵이에게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맹이가 큰 문제입니다. 그것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굼벵이가 매미가 되면 어떻습니까? 돌맹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돌맹이를 치울 필요가 없는 거지요. 날라 오르면 됩니다. 굼뱅이로 살 때는 문제이지만 매미가 되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엘가나와 브닌나와 한나에게 있었던 일은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우리는 보통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고 브닌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이 없다고 문제를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이 있고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지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지지요. 좋은 선택은 자기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쁜 선택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없는 것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주신 하늘의 선물입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있는 우주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다른 말로 하면 삶이 깨어있지 못하면 이렇게 무언가 부족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원망하고 한탄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5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
여기서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나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재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나가 잘못을 해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태가 닫혀 있었지만 하나님은 남편의 사랑을 받게 해주었지요.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한나를 괴롭혔겠지요. 또한 엘가나는 한나를 위로하고 싶지만 한나는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여기 이런 관계에서 중요한 우리 삶의 거울과 메시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브닌나가 되어 봅니다. 브닌나는 하나님이 적수의 태를 닫아 놓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한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한 것도 아닌데 그것을 이용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데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지요. 참으로 야비하고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픔을 공감하고 동감하며 품고 살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도 감사로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다른 아내 한나를 적수로 여기고 살아가는 한 브닌나의 삶도 평화로울 리가 없습니다. 상대를 괴롭히는 만큼 자신의 삶이 괴로울텐데 그것을 모르고 그것이 통쾌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또한 지금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잘못도 아니고 하나님이 태를 닫아 놓으셨는데 브닌나가 괴롭힌다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한나의 탓입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한나만 당당하다면 한나의 마음은 누가 어떻게 할 수 없지요. 한나의 수준이, 상태가 그렇기에 괴롭힘을 받는 것입니다. 한나에게 믿음이 있고 감사가 있고 자신감이 있었으면 아들이 없는 것이 한나를 어떻게 할 수도, 한나를 괴롭힐 수도 없는 것입니다. 상처는 내가 받는 것이지요. 그 무엇이 상처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똑같은 일을 당해도 반응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암에 걸린 것을 아는 순간 남 탓을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서, 남편이 혹은 아내가 자신에게 잘 해주지 못해서 몹쓸 병에 걸린 것이라고요. 그런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지요. 의식 수준이 죄의식에 걸려 있는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해도 어떤 이들은 자기 현실에 만족하면서 상황이 좋은 쪽으로 풀려 가리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암조차도 희망적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이 문제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를 찾고 내게 뭐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온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나의 문제는 브닌나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자기가 풀어야 했습니다.

자, 여기서 조금 더 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그런 자극이 있어서 한나는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혹시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이 자기가 원하는 일이었어도 남편이 주는 사랑에 만족하면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브닌나를 오히려 괴롭히며 살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 덕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이지요. 그러니 세상에 살면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닥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괴롭힘을 당하고 압력을 받으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의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라고 우리가 세상에, 지구별에 온 것이지요. 그렇게 살 때에 삶은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할 신비이며 감사가 됩니다.
동해안에서 잡은 오징어는 성질이 급해서 서울까지 이송해 오기 전에 잘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징어를 산채로 서울까지 옮겨 오기 위해서 오징어 통 속에 꽃게를 한 마리 넣는다고 하지요. 그러면 오징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온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꽃게가 오징어를 괴롭히니까 오징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를 쓰고 죽지 않는다는 거지요. 조개 속에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아실 거예요. 진주는 조개 속에 모래 알갱이 같은 불순물이 들어가 상처를 내서 그 상처를 감싸기 위해 조개가 내보낸 분비물이라고 하지요. 상처가 만들어낸 보화가 바로 진주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고난의 이유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많이 아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는 하나님 다 좋은데 아픈 것은 이제 그만이라고 기도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답니다. 아니지 내가 이렇게 아프니 하나님을 더 찾고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자기 눈의 상처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다가 이것이 나에게 족하다고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시다가 그 잔을 받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을 뜨면 삶의 문제는 신비한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히려 한나에게는 괴롭혀주는 브닌나가 고마운 존재이지요. 그러니 괴롭힘을 당할 때 괴로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내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에 우연은 없고, 다 내게 전해주는 메시지, 뜻과 은혜가 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자, 그렇게 브닌나가 괴롭힌 덕분에 한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남편의 사랑이 아니라 아이를 갖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선택은 무엇입니다. 7절에 보면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멈추니 고난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바뀌어서 엘가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함께 8절을 읽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여러분, 한나를 위로하는 엘가나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열 아들 보다 더 아내를 사랑해주는 남편의 마음이 뭉클하고 고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물어보니 여자 집사님들은 다들 한목소리로 엘가나가 얄밉다고 말합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구요. 엘가나는 착한 남편은 될지 모르지만 좋은 남편은 아닌 듯합니다. 엘가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한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없어도 괜찮은 것은 남편이지 아내는 아닌 것입니다. 엘가나는 아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주지 못하는 남편입니다. 또한 고의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기보다는 자기 위로로 안심시키고 거기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그러하였습니다. 아내가 힘들어할 때,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고민할 때 고작 해준 것은 진정한 공감이나 아내의 필요를 알아주는 것이 아닌 엘가나같은 의미없는 위로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꿈을 알아주지 않는한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엘가나가 많이 야속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편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지요. 지금 한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말로만의 위로나 이해가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주는 만남을 갖는 서로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자, 그러던 중 9절에 보면 한나는 어느날 일어나서 자리를 떴습니다. 더 이상 울지 않고 먹고 마신 뒤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슬퍼하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공부는 하지 않고 잠만 자고 게임만 하면서 공부를 잘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싶은데 울기만 해서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일어난 한나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서원하며 결단하고 아뢰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렇게 꿈을 구체화시키고 보물지도를 그려 보면 그 다음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렇게 "일어난 한나"에게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서원하고 결단하는 한나에게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를 통해 다가오셨습니다. 물론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한나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슬퍼하며 기도하는 한나에게 도리어 술 취해 있다고 나무라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붓는 한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17절이지요.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오."라고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위해 일어나 행동으로 옮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구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은혜입니다. 한나는 그 말씀 앞에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꿈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나처럼 나는 내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무언가 꿈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데 사실 조사에 따르면 단지 33%만이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또 0.3%만이 꿈을 이루고, 97%가 명확한 목표 없이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을 낳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한나는 브닌나의 격동함을 통해서 자기가 정말 얻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일어나 성전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아뢰고 꿈을 구체화시킵니다. 또 확신을 얻어 그 길로 가서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띄지 않고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자기 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간구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면 그에게 그토록 큰 기쁨이 되지 않았을 터입니다. 구하여 얻었으니 큰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다 감사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준비해 놓으셨고 다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구한 것이 있을 때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꿈과 사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만 두려움과 의무로 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그저 누구나 갖는 것 같은 아들, 꿈, 하고 싶은 일이지만 이런 관계와 과정을 통해 펼쳐지니 참 은혜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브닌나의 질투와 괴롭힘, 한나의 울음과 그것을 뚫고 일어나는 기도와 결단을 통해 찾아온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신호가 찾아옵니다. 혹여 힘들고 어렵고 억울할 순간이 찾아오면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이십시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이정표로 만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울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뢰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가서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이 이루어주심을 기다리는 오늘의 한나가 다 되어 사무엘을 낳으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한나에게는 아들을 낳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고, 브닌나의 괴롭힘에 가슴앓이만 하며 주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한나는 그것을 통해서 정말 아들을 낳고 싶은 열망을 확인하고 일어남을 보았습니다. 그런 한나를 통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희들의 삶의 역경과 고난을 한나처럼 우리가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만나는 은혜로 바꾸어 주옵소서. 앉아서 슬피 울며 원망만 하고 있지 말고 일어나 원하는 것을 아뢰며 그것을 위해 지금 해야할 일을 시작하는 저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를 통해 이 땅에 사무엘을 하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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