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20:11~18 ( 120624)
2012/6/26(화)
주일 낮예배 : 왜 울고 있느냐?  


본문 : 요한복음 20장 11절~18절
제목 : 왜 울고 있느냐?
일시 : 2012년 6월 24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요한복음 20장 10절~12절 말씀을 영어로 다시 읽어 볼까요?
10 Then the disciples went back to their homes,
11 but Mary stood outside the tomb crying. As she wept, she bent over to look into the tomb
12 and saw two angels in white, seated where Jesus' body had been, one at the head and the other at the foot.

어린이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냈어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제자들은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달랐지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어요. 왜 울었을까요? 여러분 운 적이 있어요? 어떤 때 울어요? 왜 울까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할 수 없어서 울지요. 마리아도 그랬어요. 다른 제자들은 다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울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마리아가 울다가 무덤을 들여다보니 거기에 천사가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간 다른 제자들은 천사를 보지 못했지요. 우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예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우세요. 운다고 해서 부끄러워 마세요.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거지요. 오늘 마리아처럼 어린이 여러분도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세요.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눈물을 흘리세요. 그러면 여러분 앞에 천사가 나타날 거예요.

(설교)

이른 새벽에 마리아가 전한 소식을 듣고 달려 와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도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이 있던 곳, 자기 생각의 무덤 속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치 삶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라고 다 알려주어도 우리가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옥을 살아가고 무덤 속을 헤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돈과 명예를 가지려고 하다가 자포자기하고 말지요.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다니요. 얼마나 뛰어왔던 걸음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들을 비추어주는 거울로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다시 함께 11절과 12절을 읽어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요20:11,12)"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었습니다. 왜? 길을 찾지 못해 울고 있습니다. 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지난 한 주는 어떠셨는지요?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합니다. 울지도 않고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보다 우는게 백번 낫습니다. 자 그렇게 울고 있으면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울어보셨나요? 아쉽게도 우리는 잘 울지 않습니다. 울음이 많다는 것은 사랑이 많다는 것입니다. 감동을 많이 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민감하고 깨어 있고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축복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울다가 울다가 묻다가 묻다가 어떻게 하나요?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울고 있기만 하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지요. 용기를 내어 몸을 굽혀 들여다 보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들어가 빈 무덤을 보고도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가 버린 다른 제자들은 보지 못한 것을 마리아는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에게 오는 축복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울고라도 있는 지금의 '가슴 앓이'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각을 열고 가슴을 열고 피하지 말고 직면하십시오. 실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고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니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 보는 겁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하늘 소식을 전해줄 천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무덤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 무덤이 비어 있는 이유를 알려줄 천사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 않고 울고 서 있는 사람에 찾아오는 축복, 지금 그런 우리가 마리아처럼 천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이어지는 13절을 읽겠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요20:13)"”
다들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서서 울고 있었지요. 사라진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알지 않고는 다른 무슨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디에 계실까? 사랑하는 선생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다 무너졌으니 돌아갈 집이라고 성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울었습니다. 통곡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늘같이 믿었던 주님을 잃어버렸으니 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왜 사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없으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답답하기가 그지 없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만 있습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나도 찾지 못하고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울고 있으니 물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우는지?" 울고 있지도 않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울음은 삶에 대한 열정이고 감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으니 천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물어줍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생각해 보니 울고 있으면서 한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왜 우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느낌은 생각 다음에 옵니다. 그러니 느낌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좋은 느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면 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왜 우는지 돌아보니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져가서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까요? 누가 가져가서 슬픈 것일까요? 사실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모를 뿐 사실은 있다는 말입니다. 있는데 왜 슬플까? 어디에 두었는지 모를뿐 있는줄 아니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슬프고 슬프다고 선택을 하고 그 느낌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자욱 떨어져 보면 다릅니다. 정확하게 보면 확연합니다. 느낌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달라집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는 것, 그 모르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렇게 일단 정지하고 왜 우는지 물어봅니다. 지금 묻습니다. 지금 왜 울고 있는지 말입니다.

14절에서 16절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요20:14~16)
마리아가 천사의 물음에 주님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울고 있다고 대답하고 뒤를 돌아서니 일어난 일이지요. 꺼내어 바라보니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어디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아니 울어도 우는 의미가 있고 길이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왜 울고 있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 왜 답답하고 힘이 드는지 물음을 만나고 바라보아주니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는 이미 거기에 계셨는데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는 무덤 안이 아니라 무덤 밖에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서 예수를 찾으려 하니 울음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음을 만나 알아차리고 돌아서 보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어서 함께하고 싶어서, 아니 그렇게 하나인 '참 나'로 있고 싶어서 말입니다. 사랑은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행복은 늘 손짓하고 있습니다. 없은 적이 없이 늘 있습니다. 소유하려하니 사랑도, 행복도 없습니다.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져 보십시오. 그저 눈만 뜨면 되는 것입니다.
시 한편 들려드리겠습니다. “깊고 깊습니다. 당신은 그렇습니다. 나를 사라지게 합니다. 내가 만났던 것들은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합니다. 죽도록 고민하던 것들은 가벼운 바람이었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합니다. 깊은 당신을 만나면 나는 사라집니다. 그렇게 당신은 깊고 깊습니다.”그런 당신을 만나면 모두가 사랑이고 모두가 행복이지요.

어떻습니까? 눈을 뜨면 다 예수고, 다 선생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고 메시지입니다. 구원이고 사랑이고 소망이고 믿음이고 다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찾고 있던 선생님이 눈 앞에 서 있는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꽉 차서 그렇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내 예상과 다르기에 그러합니다.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유령이라고 무서워했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물어주시는 물음, 다시 한번,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묻는 물음이지요. 왜 울고 있는지, 누구를 찾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불러주셨습니다. "마리아야!" 선생님을 만나고도 동산지기로 보는 마리아, 선생님이 그 이름을 불러주시니 그제야 알아듣습니다. 생각해 보면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백번 천번 모셔야 무엇하겠습니까? 무덤에서 예수를 찾으려 하니 답답하지요. 생각 속에서 길을 보려하니 유한이 무한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살아계신데 말입니다. 불러주시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불러주시고 대답하고 선생님을 알아보는 것이 시작입니다. "예!" "라부니!"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것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선물을, 사랑을 알아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 그게 시작입니다. 그 한마디가 나를 깨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내가 눈을 뜨고 닫힌 귀를 열어 내 앞에 계신 당신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7절과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요20:17,18)"”
이렇게 예수께서 불러주시자 마리아는 이미 그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미안해서 울고 속상해서 통곡하고 그 시신이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까지 나온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무덤 안이 아닌 무덤 밖에서 보았으니 넋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가 눈을 떠 보게 되자 예수는 말씀을 주십니다. 부름을 받아 눈을 뜬 제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붙잡지 말고 놓아달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선생님을 부르며 반가워 달려가서 얼싸안기라도 하려고 했을까요? 그런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선생님을 보고도 다시 옛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려 했기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눈을 뜬 마리아가 만나야할 것은 아버지께로 올라간 나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는 과거의 기억, 무덤으로 내려가는 나, 무덤 속에 있던 나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 있는 나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제자가 되는 것은 선생님께 기대고 의존하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청출어람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큰 기쁨은 선생을 넘어서는 제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뜬 마리아는 선생님의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리아가 기대하고 바라보았던 이전 것은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강을 건넜으니 배는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나간 과거의 기억, 습관, 생각, 의존에서 일어나 가야할 길을 가지 않으면 또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서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는데, 그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자 너희의 아버지이고, 나의 하나님이자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곧 너희 아버지시고, 내 하나님이 곧 너희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된 소식의 정점인 것입니다.
그렇게 눈을 떴으니 이제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가는 것은 너희가 있을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라 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의 처소이기도 하고 땅의 처소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가야 제자가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야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거라고도 하셨었지요. 불러주셔서 눈을 뜨고 닫힌 귀를 열어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달려가 내가 본 그 봄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늘 곁에 있는데 그것을 찾느라 울고 있는 울음을 멈추기를, 더 이상 어두운 무덤에서 헤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기억과 습관이 아닌 아버지께로 올라간 나를 만나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은 나는 더 이상 붙들지 말고 말입니다.
솔개는 독수리와 비슷한데 몸길이가 수컷은 58.5㎝, 암컷은 68.5㎝ 정도입니다. 솔개는 예전에는 남한지역에 살았으나 지금은 주로 북한지역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솔개는 수명이 길어 약 70~80년을 삽니다. 보통 솔개가 40년 정도를 살게 되면 부리는 구부러지고, 발톱은 닳아서 무뎌지고, 날개는 무거워져 날기 볼품없는 모습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 솔개는 힘들지만 중요한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서서히 죽을 것이냐?’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탈바꿈할 것인가?’ 더 나은 삶을 선택한 솔개는 바위산으로 날아가서 거기에 둥지를 틉니다. 먼저 무디어진 부리를 바위에 마구 쪼아서 낡은 부리를 빼낸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면 닳은 부리 대신 매끈한 새 부리가 자란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새로 나온 부리로 무디어진 발톱을 하나씩 뽑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낡은 발톱을 뽑은 뒤 새로운 발톱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리로 무거워진 깃털을 하나하나 뽑은 뒤 새로운 깃털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솔개는 이렇게 130여 일의 피 흘리는 고통을 통해 새롭게 40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야 더 깊은 곳,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알았다고 하는 것도 그 순간 이미 기억이요, 생각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실체가 없고, 지금이 없습니다. 예수는 심지어는 부활한 나마저도 붙들려고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지난 내 모습과 과거의 너희 모습으로 얽매여 살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변화가 없고 감동이 없는 삶은 죽음입니다. 옛 것을 붙잡고 더 살 수는 없지요. 거기서 나오는 것이 부활이요, 눈을 뜨고 주님을 본 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다시 한번 마리아의 물음을 묻습니다. 나는 지금 왜 울고 있고 누구를 찾고 있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물으며 돌아보며 무덤 앞의 마리아가 되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지금 울고 있는 저희의 마음 앓이를 아시는 하나님, 이를 통해 저희 눈이 뜨여지게 하옵소서. 허리를 굽혀 무덤 안을 다시 보게 하시고, 주님의 천사를 만나 왜 울고 있는지, 누구를 찾고 있는지 물음을 물으며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다시 뵈옵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본 것을 가서 전하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 우리 모두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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