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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20:1~10 ( 120610)
2012/6/11(월)
주일 낮예배 : 이른 새벽에  


본문 : 요한복음 20장 1절~10절
제목 : 이른 새벽에
일시 : 2012년 6월 10일, 주일예배
           
(설교)

‘사람은 위기를 마주한 순간에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 요즘 보고 있는 책에 읽는 구절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위기와 어려움들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뜨도록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위기를 만나 퇴보하고 어떤 사람은 위기를 만나 성장하기도 하지요.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위기와 두려움이라는 생각과 느낌도 한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 위기가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 도망가 숨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도리어 용기를 내어 나타나 선생님의 장례식까지 치루게 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들이었지요. 이들은 남들이 드러내어 예수님을 모시고 따라다닐 때는 숨죽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사랑과 정성을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다 떠난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용기있는 선택을 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깨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를 위해 준비된 삶, 참된 믿음과 선택, 용기와 사랑으로 오늘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살자고 함께 나누었더랬습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장사된 다음입니다.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은 잔혹한 죽음을 맛보시고 동굴 무덤에 갇혀 계셨지요. 그런데 그 무덤은 또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인생이라는 무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내가 겪는 고통과 아픔을 친히 먼저 겪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사흘 동안 갇히셨던 그 무덤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 한, 부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무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랑이 아닌 미움과 원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사흘은 꽉 찬 시간이었습니다. 압력이 꽉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혹시 문제를 만나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숨이 막히신가요? 그런데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입니다. 굼벵이는 땅에서 기어 다니니 길가의 돌멩이와 씨름을 합니다. 돌멩이가 굼벵이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굼벵이가 날아다니는 매미가 되면 돌멩이를 치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있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아니 굼벵이에게는 문제지만 매미에게는 문제가 아니지요. 매미에게는 원래부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굼벵이냐 매미냐에 달린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죽음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부활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니 죽음이 없는 세계를 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사흘을 무덤에서 보내며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을 막은 돌은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죽음의 지배를 받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으니 더 이상 돌이 그를 가로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화여대 교목을 지내신 김흥호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신비는 성숙에 있다. 성숙하여 어른이 되면 어린 때의 문제가 그림과 같다. 문제를 푸느라 애쓰는 동안에 인간은 성숙하여 문제는 없어져 버린다. 성숙해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진리의 밥을 먹고 생명의 잠을 자고 길의 운동을 가져야 한다. 모든 문제가 진리의 밥이요, 모든 사귐이 생명의 잠이요, 모든 고난이 길의 운동이다. 인간은 문제의 밥과 사귐의 잠과 고난의 운동을 통해서 보다 성숙해져 간다. 성숙한 사람에게는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 문제라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과 일들을 통해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성숙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고 성숙해지면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내가 성숙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할 것입니다. 릴케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마음 안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인내하십시오. 질문 자체를 사랑해 보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대답을 찾지 마십시오. 대답이 지금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대답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지금 당신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다 보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그렇게 찾았던 대답이 어느날 당신 안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것, 그러다 어느날 내 안에서 대답이 발견될 것이라는 믿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압력이 꽉찬 이른 첫 날 이른 새벽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새벽은 고요합니다. 새벽에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기를 채워가는 시간이지요. 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어른들은 새벽에 기도하였습니다. 만물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깨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생의 의미를 알고 있지요. 우리 시대의 천재라고 하는 김지하 시인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 시간씩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시가 나오지 않습니다.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채우는 시간이 있어야 자기만의 삶을 작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새벽에 한 시간이라도 깨어 있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예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리아에게도 문제가 있었지요. 사흘 동안이나 무덤에 있는 사랑하는 선생님의 시신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 몸에 향료라도 발라주고 싶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면서도 염려와 걱정이 있었습니다. 가기는 가는데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치울까 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어떻습니까?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만 하고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돌은 무덤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옮겨 가보면 사흘이 지나 "이미 돌은 옮겨져 있다!" 돌을 치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한 걸음 옮겨가보면 됩니다. 그냥 새벽에 일어나 무덤에 가보면 되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게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뿐입니다. 지금을 사니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이렇게 오늘을 사는 사람이 영원한 사람입니다.
또한 마리아에게 무덤은 생각도 하기 싫은 곳이었지요. 게다가 사랑하는 분이 죽어서 묻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기 싫은 곳, 두려운 곳, 상처와 아픔이 있는 그곳으로 새벽에 갔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주저하는 무덤은 어디인가요?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의 기운이 달라집니다. 몸이 상쾌하고 뿌듯하고 활력이 솟으니 마음과 태도까지도 긍정적이 되지요. 그런데 운동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귀찮고 하기가 싫습니다. 계속 풀어져 있고 싶어요.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공부도 그렇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그래요. 시작을 하고 나면 신이 나고 행복한데 시작하기가 힘이 들지요. 그런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갔습니다. 그리고 가보니 이미 무덤을 막은 돌이 옮겨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움직여 본 마리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덤에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본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해야했을까요? 무덤에 계신줄 알았던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다고 전해야 했지요.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신이 나야 할까요? 그런데 뭐라고 하나요? 함께 2절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누가 선생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자기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보여주셨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 수준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별을 보고 사탕같다고 하고 배고픈 사람은 별을 보고 쌀같다고 하고 전쟁터의 군인은 별을 보고 폭탄같다고 할 것입니다. 보여주었는데 자기 생각대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우리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이 그 분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덤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생각과 기준으로 바라보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굼벵이가 매미가 되어 하늘을 나르고 있는데 개미와 지렁이들은 같이 놀던 굼벵이의 고치가 갈라진 것을 보고 굼벵이가 죽었다고 장례식을 치르고 통곡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생각과 다른 상황을 만나면 당황하게 되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렇게 마리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자기 예상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럴 때마다 얻는 것은 이런 터무니 없는 오해와 그릇된 판단, 그리고 거기서 오는 좌절감을 맛볼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좋습니다. 그와 같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저 빛나는 세계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 앞에서 낙담하여 돌아서는 마리아의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실수와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예상과 내 판단이 깨어지는 경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결단코 진리가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이른 새벽에 마리아가 홀로 하고 돌아와 전해준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뛰어가는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얼마나 빨리 뛰었든지 한참이나 앞서 무덤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몸을 굽혀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했는데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온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무덤 안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나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쌌던 수건과 삼베였습니다. 수건과 삼베는 시신을 싸매는 장례용품입니다. 무덤에 들어가는 필수품이지요. 시신의 수치와 상처를 감싸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날을 준비하면서 좋은 수의를 하려고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건과 삼베는 시신을 싸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 역할이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무덤에 수건과 삼베가 개켜져 있었던 것은 ‘그 임자는 없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이 보고도 엉뚱한 것을 믿었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다구요? 예수님께서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에게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는데도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요? 10절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만 보았지 그 의미를 놓치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랑하는 선생님이 죽어서 무덤에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본 ‘사실’은 예수님이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사실’을 보고도 다시 있던 곳, ‘생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생각의 집이 이리도 크고 무섭습니다.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알려주어도 알지 못하지요.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합니다. 상징을 읽지 못하고 신호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다니... 얼마나 뛰어왔던 걸음인데 여기서 그냥 돌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오셨는데 제자들은 무덤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러한 무덤, 그런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믿고 그와 함께 있다면 땅을 기어 다니는 굼벵이가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미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덤에 갇혀서 죽음을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이고, 나는 부활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애벌레의 본성이 나비이듯이, 나의 본성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는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있다면 변화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얼굴을 감싸고 있는 수건과 몸을 칭칭 동여 매고 있는 삼베를 풀고 나와야 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그 이른 새벽에 이렇게 빈 무덤을 보고도 다시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제자들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다 알려주셨는데도 다 이루어주셨는데도 선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 속으로 자기 고집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만든 지옥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불러주셨는데 아들로 살지 않고 종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슬픔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의 존재로 살지 못하고 죽음의 현상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으로 살지 못하고 율법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 통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과 분별을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는데 그것을 보고도 자기들이 있던 곳, 무덤으로 돌아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른 새벽에 일어나 무덤까지와 새로운 비밀을 먼저 발견하고 전했던 마리아처럼 하기 싫고 귀찮고 힘들다고 여겨지는 일들, 그런 무덤으로 이른 새벽에 나와서 이미 옮겨져 있는 돌문을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문제는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숙하여져서 문제가 사라지고 없을 때는 문제를 풀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또한 빈 무덤을 보고도 다시 자기들이 있던 무덤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제자들처럼 살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이미 옮겨진 돌문, 사라진 무덤의 문을 나와서 생명과 부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던 마리아의 용기와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주저앉아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시고 일어나 그곳으로 가서 이미 옮겨진 돌문을 경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는데 여전히 무덤 속에 꽁꽁 숨어사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일어나 묶고 있던 삼베와 싸매고 있던 수건을 풀어 놓고 성숙하여 부활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름에 깨어있는 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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