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7:24~30 ( 120527)
2012/6/3(일)
주일 낮예배 : 그 발 앞에 엎드려  


본문 : 마가복음 7장 24절~30절
제목 : 그 발 앞에 엎드려
일시 : 2012년 5월 27일, 주일예배

(설교)

예전에 한국에서 사역했던 교회에서 처음 오신 분들을 돌보는 새가족부를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에게 꼭 소감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교회에 첫발을 내딛는 고백은 늘 감동적이고 새로웠지요. 오늘은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의 느낌과 마음이 어떠신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처음 교회를 찾을 때의 마음,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이 살아 있는지요?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참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물을 선물로 받지 못하니 말입니다. 몇해 전에 토론토에서 교회에 나오고 싶으시다는 분이 계셔서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할 줄도 모르는데 교회 가서 폐만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시는데 참 마음 씀이 예뻐 감동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무엇을 못하겠어요. 왜 교회에 나오시려고 하냐고 물으니 살다보니 마음도 힘들고 믿음도 갖고 싶고 그러시다고 하셨지요. 저는 그런 아프고 힘든 일 덕에 이렇게 교회도 만나고 성경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더랬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신지요? 혹시 답답하고 힘이 드시나요? 우리 삶의 행복과 기쁨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다 그 분 뜻이니 무엇이든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좋은 일 될 것임을 믿는 믿음 안에 행복과 기쁨이 있지요. 참새 한 마리도 의미 없이는 떨어뜨리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분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필요해서 일어나는 일이니 안심할 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그분은 지금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감동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해인 수녀님의 시 한편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아플 때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자, 여러분,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왜 이런 이야기가 지금 이 시간, 예배로 모인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게 찾고 찾으면 지금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우리를 일깨워주실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 일어나셨나요? 이런 저런 다툼이 있는 곳, 오해와 불신으로 부딪히고 곤고한 삶의 자리입니다. 어찌 보면 지루하고 지겹고 피하고 싶은 자리이지만, 그런 일은 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덕분에 우리는 또 하나의 깨달음과 진리, 삶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떨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하게 음식을 먹느냐고 따졌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고 안에서 나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씻고, 씻지 않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정하다고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문제라고 것이지요. 내가 문제로 보는 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옳고 그르다는 선악의 잣대로 보는 겁니다. 선악과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투고 미워하고 부딪히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어나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에서 일어나십니다. 그런 다툼의 자리에서 이제 일어나십시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의 다툼에서 벗어나 다 좋은 은혜의 믿음 세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또 어려운 문제를 풀었는데, 이것을 이루었는데 이제 그만 머물러나 있고 쉬고 싶은 마음도 들 터입니다. 이제 여기까지만 하자! 이만하면 되었지? 그러나 거기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머물러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거기서 일어나 한 걸음 옮겨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끝이 아닙니다. 끝은 없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졸업식 훈화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그렇습니다.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때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많이 부끄러웠고 죄송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넘어지고 묶여 있습니다. 토론토에서 보낸 10년이 100년은 산듯했지요. 이곳에서 함께 꿈을 꾸고 사역을 한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며 입버릇처럼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만 살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꾸고 싶은 꿈도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만하면 되었지 뭘 더 바라겠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거기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로 들어오셔서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나의 갈 길을 가야 하겠다고 속삭여 주셨지요. 늘 새로운 시작인데 이제 다 끝났다고 앉아 있는 제의 모습을 말씀이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일어나야지요. 여러분, 이제 거기서 일어나라고 주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묶여 있고 절망하고 좌절해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입니다.

또 24절에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일어나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왜 들어가셨을까요? 또 그 집은 어디였을까요? 또 왜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을까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집이 아닌, 나의 집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번도 떠난적이 없이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숨어 계실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숨어 계실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숨어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드러나셨습니다.
사실, 나타나지 않으면 이상한 일입니다. 나타나는 것이 자연입니다. 언젠가 제 친구에게 들었던 멋진 고백이 늘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희망은 몸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감염된다는 거지요. 그러니 전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나누어지고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하려니 힘들고, 없는 것을 있는체 하려니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내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안다면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숨어 있고 싶어도, 감추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도리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전염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 그렇습니다. 신비입니다. 그것을 잃고 그것이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겠지요. 숨어 있지 말고 드러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시는 주님과 함께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로 하지 않고 있는 그것을 드러내는 삶으로, 내 색과 빛을 내도록 보여가는 것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알고 있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성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뿐이다.” 그렇게 드러내어 사는 삶입니다. 등불은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침상 아래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 빛나게 하는 것이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그런 예수님 앞에 누가 찾아왔나요? 아니지요.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아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본문에서는 한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여자입니다.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악한 귀신에 의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냥 느낌 없이 볼 수 있지만, 그 입장이 되어 보면 이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귀신에 들려 고통을 받는다고 해도 얼마나 힘겨울까요? 그런데 차라리 그렇다면 나을지 모릅니다. 딸이 그런 고통 중에 있다면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합니다.
우리 생에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성공만 하고 싶지만 실패는 늘 따라다니지요. 실패 없이 성공이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가 진한 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신비하지요. 고통과 스트레스가 없으면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생의 많은 현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우리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밝음은 우리를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우리를 성장 시킵니다. 밤에 사람은 큽니다. 잠을 자야 아이의 키가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낮만 있다면 아이가 자라지 못합니다. 밤이 있어서 한계에 부딪혀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지요. 그런 감사입니다. 그래서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 서 있으니 들을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통째로 있는 그대로 듣습니다.
여기 예수님 앞에 나오는 여인의 태도를 보세요.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곧바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들었습니다. 둘째로 곧 왔습니다. 셋째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요. 내 생각은 빼고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와서는 발 아래 엎드립니다.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바짝 엎드렸습니다.
자, 이 여인은 목적이 있어 나왔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 아이의 병을 고쳐야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간청을 합니다.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선생님 앞에 나올 때의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소문을 듣기만 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그 앞으로는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간청하지 않으면 생에서 얻을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봅니다. 27절에 그렇게 간청하는 여인은 안타깝게도 더 혹독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간청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이라면, 선생님이라면, 목사님이라면 당연히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간청을 들어주어야하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기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시나요? 네.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 이방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던 여인입니다. 그 여인을 감싸주시지는 못할망정 그 여인의 가장 큰 약점,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개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개라고 하다니, 있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아픈 딸 아이를 고쳐달라는 불쌍한 여인의 애절한 청원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고 간청하고 나왔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정의감에 불타서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의 반응이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스스럼 없이 자신을 주인의 상 아래 있는 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청입니다.
29절에,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으니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온 여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앞에 서는 제자의 마음, 태도입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정말 무엇을 얻고 싶은지 알고 있는지 살펴보신 것입니다.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으니 돌아가라”셨습니다. 여인이 진정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가 나서 돌아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그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간절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굴이 아닙니다. 나의 기대, 나의 생각과 아집과 욕심을 씻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 여자의 딸이 고침을 입었나요? 여자가 그렇게 말해서입니다. 정확하게 보세요. 예수님이 고친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자기 딸을 고친 것으로 성경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다 나의 책임,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맡겨주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지 않고는 살아날 길이 없지요. 예로부터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는 일이라 했습니다. 선생님 앞에 잘잘못을 따지고 덤비고 대드는한 선생님께 배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생님이라도 그런 제자에게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난 선생이라도 자신을 죽이고 나오는 제자에게 모든 것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아이들은 선생님이고, 상담자에게 내담자는 선생님입니다. 목사에게 교인은 그렇게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선생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삶 앞에 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 안을 때, 나의 곤고함과 아픔까지도 영접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이방 여인은 그렇게 선생님을 만나고 치유와 구원을 만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알고 하고 싶은 것을 알고 곧바로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지요. 그것을 위해서는 개와 돼지도 될 수 있습니다. 능수능란입니다. 자유자재입니다. 삶을 바꿀 수 있는 생의 비밀,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가 아니지만,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개가 아니기에 개가 될 수 있지요. 만일에 개라면 개라는 말에 화를 내겠지요. 자존심이 상하겠지요. 비굴해지겠지요. 그러나 개가 아닌데 어떻습니까? 그 무엇도, 그 어떤 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나로 삶으로 나아갈 때에 귀신은 나가고, 병은 고쳐집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을 만나야겠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개가 된 여인, 또한 여기에 누구보다 당당한 여인, 당당한 삶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비판에 좌우되지 않는 진실이 있습니다. 수준이 낮으면 발끈합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에 끌려 다니고 상황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 있으면 흔들림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와 평화와 사랑의 틀 안에 있으면 흔들림이 없습니다. 여인은 그런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으니 이제 귀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가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귀신은 나가고 없었습니다.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소원과 꿈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발 앞에 엎드려 가만히 정말 내가 원하는 바를 간구하십시오. 시련과 역경, 억울한 일이 닥쳐도 믿음을 잃지 않고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변화무쌍하고 유연하고 자유자재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나섰던 이방 여인처럼 평생 들어온 수치심과 모욕에도 좌우되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정말 원하는 바를 간청하여 얻게 하시고, 그 무엇이 되어도 나는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당당함과 용기와 힘을 저희가 갖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런 믿음의 자리에 서서 삶에 승리를 얻어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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