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산의 길 위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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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창2:1~17 ( 120429)
2012/5/6(일)
주일 낮예배 : 에덴 동산에서  


본문 : 창세기 2장 1절 ~ 17절
제목 : 에덴 동산에서
일시 : 2012년 4월 29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7절 말씀을 영어로 다시 읽어 볼까요?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어린이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아니 한달간 어떻게 지냈어요? 봄을 맞이하면서 무엇이 가장 좋으세요? 그런 좋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셨나요? from the dust of the ground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땅의 먼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게 하셨다 했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있고, 더불어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숨으로 생명을 얻은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숨이고 바람이라고도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숨을 쉬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시는 거지요. 숨을 쉴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고 계시다. 하나님이 늘 함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어린이 여러분을 교회학교로 파송하겠습니다.

(설교)

봄이 오는 자연이 참 아름답습니다. 고요하기까지 합니다. 한국은 4월 중순에 갑자기 봄이 확~ 왔습니다.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 목련, 라일락까지 한꺼번에 피어서 온 산하가 장관을 이루었지요. 운전을 하는데 눈 둘 곳이 없어서 당황하기까지 했습니다. 토론토로 오니 또 찾아오는 연두빛 들녘이 참 고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계는 그렇게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지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지요. 부족함이 없습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그런 선물로 주신 세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다 만드신 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장 1절에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지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면 우리도 다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세상이지요. 한국에 다녀와서 수련만 하고 왔다고 하니 조상두 목사님이 거기서 뭐하느냐고 물으셨더랬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굳이 알려드린다면 이렇게 다 이루어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달라지고 변화되는 삶이 있지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 이루셨으니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내 기준과 고집이 그렇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사는 가장 큰 요인은 ‘관계’입니다. 그것도 가족관계가 기본이지요. 그런데 사실 부모님은 낳아주신 것만으로 일을 다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이런 삶을, 이런 아픔과 기쁨도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눈에 부족해 보이는 자식도 그렇습니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한 것이지요. 오늘 하루는 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아침에 눈이 떠지고, 손이 올라가고 발이 움직이고 심장이 뜁니다.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 그렇게 계절을 내가 움직이려 해 보세요. 얼마나 심란할까요? 숨을 쉽니다. 누가 숨을 쉬는 것일까요? 내가 숨을 쉬나요? 정말 내가 숨을 쉬는 것일까 한번 알아보세요.
2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여기서 엿새와 이레는 하루, 이틀, 사흘... 뭐 그런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상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징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율법이고 교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 수’라고 하지요. 꽉 찬 것입니다. 꽉 차고 완전한 이렛날은 어떻게 맞이하는 것일까요? 다 마치야 맞이하는 것이 이렛날입니다. 그리고는 쉼이 찾아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복되고 거룩하기 위해서는 다 마쳐야 합니다. 다 마친 삶이 복되고 거룩합니다. 다해서 할 때 깨끗합니다. 없이 하지 못해서 ‘덜’ ‘없어서’, 없음이 덜해서 더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누다 말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찝찝합니다. 그런데 시원하게 다 누고 나면 어떻습니까? 이보다 좋을 수는 없지요. 시험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고 나면 결과가 어떠하든지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마치지 못하면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복과 거룩을 맞이하지 못하지요.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런 참 안식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칠일 중에 하루,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지으실 때 다 이루시고 쉬신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 이룰 때 신이 납니다. 다 이루지 못해 외롭습니다. 다 이루지 못해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하고 나서야 쉼이 있는 것입니다.
Desire가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신의 의도대로, 신의 그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욕망이라고 표현되어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욕구, 또 그것을 이루어갈 소질과 재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오늘 내가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면 기운이 나고 활기가 차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Desire!입니다. 어느 화가는 어께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은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께가 너무 아파서 아픈 어께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나의 디자이어에 닿으면 아기가 태어납니다. 씨를 맺고 열매를 거두지요.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그리며 푸른 움이 돋고 열매를 맺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그 창조의 이야기는 오늘 '나'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나도 그러해야하는 것입니다. 너도 그러해야하지요. 그 디자이어에 일치될 때 삶은 의미가 있고 이마에 빛이 나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가슴에는 희열이 솟아 오를 것입니다. 오래전에 만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있인데 이번에 광화문에 가니 교보빌딩에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자, 4절부터는 다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 땅은 비가 내리지 않아 황량하고, 나무도 없고, 풀 한포기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물이 솟아나 온 땅을 적셨을 뿐이지요. 창조의 처음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고 하루를 여는 그 처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무도 없고 풀 한포기도 돋아나지 않는 땅 뿐입니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메마르고 황량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오기 위해서는 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흙은 더러운 먼지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요. 이 흙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육신을 뜻합니다. 사람이 입은 육신의 옷인 것이지요. 예쁘고 밉고 건강하고 약하고 크고 작다고 여기는 그것입니다. 그런 옷을 입는 것이 땅의 흙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도 그런 옷을 입고 먹고 자고 합니다. 그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코에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져야 했습니다. 숨이 코로 들어와 사람이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은 숨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이라고도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통찰인지 모릅니다.
자, 여기서 다시 숨은 누가 쉬는 것일까요? 숨은 내가 쉬지 않습니다. 내가 쉰다고 여기면 한번 숨을 멈추어 보세요. 멈출 수 있는지. 그런데도 내가 한다고, 흙으로 지어진 나의 몸이 나라고 우기며 살아갑니다. 숨은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이 숨을 쉬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하면 숨은 하나님이 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히브리인들이 본 바대로 성령이었습니다. 그 바람은 또한 Hope, 나의 희망이며 Desire를 말합니다. 그렇게 지음을 입은 것이 사람,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도 찾아온 숨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서 산다고 하니 삶이 늘 허겁지겁이고 방향을 잃는 것입니다. 찾아온 나의 Desire,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잃어버리고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 모양 그 꼴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그 '나'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땅의 흙으로 지어진 나,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기운인 나가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땅으로부터 온 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생명체가 되었지요. 진짜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알아야 사람이 됩니다. 그 뜻을 이루고 가고 그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대 행복한 것이 우리네 삶인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8절을 함께 읽습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합니다. 에덴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동쪽은 시작입니다. 삶의 처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일구신 이유는 사람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가 있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동산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오늘 나를 위해 이 동산을 일구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두신 그곳이 에덴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에덴은 어디에 있습니까? 처음 히브리인들이 본 에덴은 비손강과 기혼강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이 흘러 나오는 곳이었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에덴은 온타리오 호수와 심코 호수와 세인트 로렌스 강과 알콘퀸 파크가 발원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북한강과 남한강, 임진강과 서해가 흘러 나오는 곳이지요. 하나님이 그곳에 동산을 지으셔서 여러분을 데려다가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동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열매가 있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15절에서 17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내가 먹고 싶은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여기에 하나님이 나를 데려다 두셨습니다. 맡아서 돌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셨지요.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구요. 우리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죽음은 원래 없었지요. 갓난 아이들에게 너 죽는다고 협박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똥도 더럽다고 하지 않고 장난감으로 아는 아이니 말입니다. 더럽다는 생각은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갓난 아이들에게는 그런 판단과 분별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은 그런 판단과 규정 안에 있을 뿐이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이전에는 죽음은 또 다른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여행이고 축복입니다. 죽음이 좋은 것, 싫은 것이 없었으니 그런 이름도 없는 삶의 과정이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으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선과 악, 판단과 분별의 세계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갓난 아이로만 사는 것은 세상에서 사는 삶이 아니지요. 절대 세계에만 있으려면 어찌 상대 세계로 왔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입니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은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니 선악과를 먹는 것은 사람의 운명인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성이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예술과 종교이기도 한 것이 선악과입니다. 물론 그것을 먹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고 불순종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고 그것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에덴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고, 인류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돌아가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멋진 비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는 선악과를 먹지 않은 에덴 동산입니다. 첫째 아들이 그랬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둘째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살아 계신대도 유산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나갑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흔쾌히 아들을 내보내주지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그 유산을 다 써버립니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배가 고파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불만과 불평을 하지요. 그러니 다 해보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려면 하늘에 있지 무엇하러 세상에 내려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있지 않고 캐나다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희노애락, 그런 분별이 있어, 기쁨과 슬픔이 있어, 생로병사가 있어, 행복과 불행이 있어, 어두움과 빛이 있어, 낮과 밤이 있어 인생입니다. 이제 그런 인생을 즐기고 누리다 죽음으로 갈 것입니다.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경지로 가야합니다. 선악과를 뱉어내고 판단과 분별이 없이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 일, 그대로입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 때, 삶도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죽는 삶에서 죽음이 없는 삶으로 가는 것이지요. 에덴에서 나왔다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나무들, 생명나무, 선악과 모두가 다 나를 나되게 하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는데, 참 쉼이란 무엇일까요? 숨이 그러한 것처럼 쉼도 내가 쉴 수 없습니다. 그저 쉼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쉴 수 있습니다. 판단과 분별을 하는 선악과의 세계에 사는 한 쉴 수가 없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기도이고 명상이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쉼이 있지요. 지금 여기에 항상 있는, 한번도 떠나지 않은 그 사랑 안에 있는데 그것이 없다고 불만불평하고 찾아 헤메고 있으니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 눈을 뜨면 이리도 좋은 세상입니다.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항상 있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을 때 세상에 나타는 우리는 외롭지 않고 곤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것과 떨어져 있으니,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니 곤고하고 방황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습니다.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이지요. 깨어나면 내가 그것들을 마음대로 하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들이 나를 마음대로 합니다. 꿈 속에 있으면 꿈이 나를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내가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에덴에서 나와 깨어나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주시고, 한 가운데 생명나무를 주시고, 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셔서 사람으로 살게 하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에덴을 일구시고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에덴의 주인으로 삶의 창조자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다 이루신 후에 쉬셨던 것처럼 저희도 맡겨진 일, 사명을 다하여 쉼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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