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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19:16~30 ( 120304)
2012/5/6(일)
주일 낮예배 : 십자가 곁에 있었던 이들  


본문 : 요한복음 19장 16절~ 30절
제목 : 십자가 곁에 있었던 이들
일시 : 2012년 3월 4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19장 30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30 When he had received the drink, Jesus said, "It is finished." With that, he bowed his head and gave up his spirit.

어린이 여러분, 지난 한주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자비로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하고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다 오늘 예배를 함께 드리게 되어 참 고맙고 반가워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입니다. ‘It is finished.’ 한글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라고 번역이 되어있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을 아셨고 또 다 이루고 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지요. 이제 목숨을 바쳐서 그 일을 이루셨어요.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여러분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왕으로 살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의 일을 다 이루기를 도와주실 거예요. 그런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어린이 여러분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겁한 권력자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으면서 반역자를 두둔하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군중들의 압박에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지조가 없어 사람이 되지 못한 빌라도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지요. 지난 한 주간도 빌라도에게처럼 여러분에게 찾아온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고 풀어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권한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혹시 오늘 나도 내가 섬기는 나의 우상,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의 권력인 로마 황제에게 잘못 보일까 두려워 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버려 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가로막고 있는 그것, 나의 뜻과 마음과 몸을 무너뜨리는 그것이 로마 황제입니다. 내게 있는 중독, 습관, 돈, 권력, 명예, 안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온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지 않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우리 함께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이야기입니다. 16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진실한 믿음의 선택이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고 옹색한 몰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참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나의 선택이니 감사히 당당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넘겨져서 끌려 다니는 인생이 되고 말지요. 우리 예수님은 넘겨졌지만 넘겨지지 않으신 분이시지요. 늘 당당하고 자신 있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17절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고 하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고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한 마디로 서술되어 있는 이 장면, 그러나 십자가형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해낸 최악의 형벌이라고 합니다. 총살이나 교수형 등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빨리 죽이는 것이 그래도 인도적인 사형이지요. 십자가형은 적어도 일주일은 나무에 매달려 피를 말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합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피를 짜내는 형벌입니다. 매달려 있는 동안 까마귀 같은 새들이 달려들어서 눈알을 파 먹고 산채로 내장을 파헤치기도 한다지요. 벌거벗겨져서 그 위에 달려 있으면 사람의 체면이고 위신을 다 내팽개쳐서 보는 사람들의 본보기를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십자가에 달리는 사형수는 노예나 정치범이었다고 합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는 노예들이 도망칠 생각을 못하도록, 반역자들은 이런 최후를 당하니 로마에 항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가장 비참해지셔서 그 일을 없이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가이드를 하면 늘 전해주는 전설이 있습니다. 폭포 밑으로 내려가는 배가 있는데 그 배의 이름은 Maid of MIst 이지요. 이른바, ‘안개의 숙녀호’입니다. 그 배에 붙여진 이름에는 전해지는 전설이 있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인디언 말로 천둥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울리는 천둥과 같은 소리를 신의 노여움이라 생각하고 해마다 처녀 제사를 지냈다고 하지요. 온 부족이 모여 제비를 뽑아 뽑힌 처녀를 배에 태워 폭포 밑으로 떨어뜨려 신의 노여움을 풀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에 온 부족에게 존경받는 추장이 있었답니다. 덕망이 높고 정치를 잘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때가 되어 그 해 제비를 뽑았는데 덜컹 추장의 딸이 뽑혔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요. 추장도 부족민들도 모두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전통대로 의식을 치르고 공주를 배에 태워 떠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전날부터 추장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공주가 탄 배가 폭포 앞에 다다랐을 때 폭포 앞에 있는 ‘염소 섬’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배 위로 뛰어 오르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답니다. 그리고 배는 폭포 밑으로 떨어졌지요. 그 이후로 사람들은 추장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겁에 질린 딸을 품에 안고 함께 폭포로 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처녀제사를 지내는 악습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의 교훈입니다. 이것이 추장이 자기 백성과 딸을 함께 사랑하는 최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추장이 스스로 폭포에 떨어지는 죽음을 선택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처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말로만 처녀 제사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나쁜 전통인지를 백번 설득하는 것보다 함께 그 고통을 당해 단번에 악습을 끊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절기로 사순절을 보내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 합니다. 어떤 이들은 40일간 새벽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금식을 하여 배고픈 고통을 느끼며 참회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슬픔에 복받쳐서 눈물까지 흘리지만 어떤 때는 아무 감동 없이 의지만으로 나의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으리라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떨어진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와 일치시키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물어보며 묵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 사이에 벽이 무너질 때 진짜를 경험하는 거지요.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계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을 넘은 영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몸과 나의 몸이 하나가 되어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는 비밀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힘입니다.

18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좌우에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강도요 죄수였는데 한쪽은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면서 예수님을 비방하였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은 아무 잘못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에 함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이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더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대항하다가 반역죄로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지였기에 나눌 이야기가 많지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지를 돌아보면서 우리 삶의 거울을 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어떤 죄목, 어떤 이름이 붙여졌나요?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명패를 붙였는데 그것도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과 라틴 말로 적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명패를 읽었습니다. 이것을 본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퉁명하게 자기가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라고 한 적이 없지요. 그냥 왕이셨습니다. 원래부터 왕으로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스스로 왕이라 하였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되려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세상의 왕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왕이 아니었지요. 그네들이 그런 왕이 되고 싶어 다투고 싸우고 있었으니 예수님도 그렇게 보았을 뿐입니다.
자, 여기서 오늘 나에게는 어떤 명패가 붙을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최고의 절정에 있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붙일 이름, 아니 내가 나를 드러낼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그것은 곧 이루어져 있을 터입니다. 어제 예가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며느리를 찾는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보낸 나이 많은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은 우연의 일치처럼 딱딱 들어 맞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돌아보면 지혜로운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꿈꾸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리브가가 다가왔어도 그것이 리브가인지, 정말 원하고 찾았던 그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늘 나의 명패도 내가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목사’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한번 찾아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곧 그렇게 되어져 있는 여러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늘 없는 것으로 살다 마쳐지겠지요.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등장하는 병정들이 한번 되어 보세요. 어떻습니까? 병정들은 위에서 시키는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그리고 습관대로 옷을 가져다 전리품으로 찢어 챙기고 제비를 뽑아 나누었고 그 덕분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도리어 짜릿하게 그 일을 즐기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직업이고 시키는대로 했으니 아무 잘못이 없다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무지한 것이지요. 깨어 있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의식에 사로잡혀서 습관적으로 하루를 살아간다면 이 병정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지 모르고 망치를 휘둘르고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는줄 모르고 전리품을 나누며 희희덕거리고 있겠지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도 저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막벨라굴이라 여기며 소개받은 뉴마켓의 양로원을 구입하고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 일에 제동이 걸려 잠시 주춤하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입니다. 뉴마켓의 양로원 인수를 살피는 과정에서 어느 분이 들어와 양로원을 자기에게 양보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 양로원 인수에 여러 걱정스런 부분이 걸려서 주춤해질 때 알아차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가 명료해지는 것이지요. 일이 다 잘 되어갈 때는 모르지요. 또 그런 일이 없었으면 정말 그 일이 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돌아보지 못한채 끌려다니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어나는 일들 덕분에 더 명료하게 알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받으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데 가룟 유다와 병정들도 그런 역할을 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으셨습니다. 왜? 속옷까지 벗겨져서 병정들의 전리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가셨지요. 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또 그래서 다 이루고 다 가지고 가셨던 분이셨습니다. 무지한 병정들이 그런 예수님을 만들어 주었고 그래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병정들 말고 네 명의 여인들과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지요. 함께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읽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되어 보신 분들은 마리아의 심정을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가 되어 보아도 그러하겠지요.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참혹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어느 분은 이를 무력한 사랑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고통이 그 보다 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감당해 낸 것이 어머니 마리아였지요. 그런 마리아였기에 예수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들은 소식이 있었지요. 예수님이 열두살에 성전에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을 때도 마리아는 그 소리를 마음에 새겼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맡긴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게 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날부터 요한은 마리아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느라 제자 중에 유일하게 박해를 받지 않고 순교를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죽은 후에 다시 등장해서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가장 오래까지 살아서 많은 일들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두가 나의 아들이고, 또 모두가 나의 어머니가 되는 기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내어 드리고 그래서 자신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과 일깨움의 절정이 있는 자리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28절에서 30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목이 마르다고 하셨던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또 목이 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이 마르다고 하시니 사람들은 신포도주를 대에다 꿰어 주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목마름이 마실 물이 없어서일까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도 우물의 물은 마시면 또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기다리는 예수님은 목이 마르셨던 것이지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근이라고 했던 이사야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양식이요, 음료였지요. 2002년 올림픽 영웅 히딩크도 자신의 축구팀 대한믹국이 8강에 올라선 소감으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 죄에 억눌리고 자기가 누구이고 어디 있는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모르고 사는 이들이 있는한 예수님은 목이 타고 배가 고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순간에도 목이 마른 갈증으로 사셨기에 다 이루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다 이루는 마지막까지 갈증을 느끼며 나의 일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일은 한 것입니다. 생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십자가 형틀, 남은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인 그 참혹한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병정들은 죄없는 이를 그 십자가에 못박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 사람의 옷을 벗겨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일과 사람에 매달려 있지 않은 자유함입니다. 그래서 그들 덕분에 예수님은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가시는 당신의 일을 다 이루셨지요. 그가 갈 때는 속 옷 한장도 자신의 몸을 가리는데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병정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챙겼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을 예수님되게 도운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자기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서 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여겨지는 것들, 유다와 병정들 덕분에 내 길이 더 명료해집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탓하고 원망하는 귀신에 들려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요. 오늘 우리는 너무나 많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벗겨 나누어 갖는 병정들을 보면서 오늘 나는 무엇을 남길지,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지만 그래서 사람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고초를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오늘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조롱과 고초를 고스란히 받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저들이 위로와 힘을 얻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이 지금 저들의 환란과 곤고에 찾아와 어루만지고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병정들이 못을 박고 옷을 나누어도 그것이 아버지의 일임을 알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신 예수님처럼 저들도 믿음 가운데 깨어서 살아가게 하시고 후회없이 남길 것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하여 살아가는 저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늘 사랑에, 하나님이 주신 일에 목이 말라 있게 하시고, 그래서 다 이루는 저들이 되게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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