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8:12~27 ( 111211)
2011/12/19(월)
주일 낮예배 : 곧 닭이 울었다.  


본문 : 요한복음 18장 12절~27절
제목 : 곧 닭이 울었다.
일시 : 2011년 12월 11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25절과 27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25 As Simon Peter stood warming himself, he was asked, "You are not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He denied it, saying, "I am not."
27 Again Peter denied it, and at that moment a rooster began to crow.

여러분, 오늘 읽은 이야기에 등장 인물이 누군가요? 찾아보세요. 베드로와 묻는 사람, 그리고 닭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반장이었어요. 그런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추워서 불을 쬐며 몸을 덥히고 있었던 거지요. 얼마나 추웠을까요? 날씨가 추워서 그랬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귀찮게 자꾸 물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구요.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베드로도 붙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이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였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려니 얼마나 추웠을까요? 여러분이 숙제를 해야 하는데 숙제가 없냐고 누가 물었을 때 숙제가 없다고 하면 어떨까요? 들통이 날까봐 겁이 나지요? 추운 거예요. 숙제가 있으면 숙제가 있다고 말하면 쉬워요. 그런데 아니라고 하니 힘들고 어려운 거지요. 27절에 베드로가 세 번째 아니라고 하니 At that moment, 바로 그 때에 rooster, 닭이 울었어요. 사랑하는 예수님이 닭이 우는 소리를 듣게 해주신 거지요. 닭이 울면 아침이 밝아오고 추운 밤이 지나 갑니다.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고 슬퍼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진짜 제자가 되지요. 어린이 여러분도 이제 베드로 아저씨처럼 예수님이 닭이 울게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닭이 울면 아침이 와요. 아침이 오면 어둠이 지나갑니다. 더 이상 거짓말 하고 숨길 수가 없어요. 이제 감추고 숨기지 않고 꼬꼬댁~~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 어린이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아침을 맞이하는 어린이 여러분을 교회학교로 파송하겠습니다.

(설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그만큼 내 삶만 불행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내 십자가라, 내 몫이라 영접할 때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깊은물님이 백혈병을 만날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왜 하필이면 나냐고 원망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고 성장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영적 안내자이고 목사가 아프다니 면목 없어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 잔을 마시기로 하신 예수님처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몫이라 받아들이며 그 일이 전해주시는 소식을 듣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다시 아프지 않게 해준다고 해도 나는 그냥 아프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보여주셨습니다. 무기와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들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이 시키는 일에, 조건과 조항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찾아야 했던 것은 진정한 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는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야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였다는 말씀이지요.

이제 그렇게 자신의 잔을 받아 예수님께서는 붙잡혀가셨습니다. 함께 12절에서 14절을 읽겠습니다.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잡아 묶어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데 가야바는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유대 사람에게 조언한 사람이다."
당시에는 대제사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그 해의 대제사장을 맡았지요. 그 때는 가야바라는 사람이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나스에게로 예수님을 데리고 간 것은 안나스가 대제사장 중에서 실세였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그 사람은 가야바의 장인이기도 했지요. 가야바는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할 때에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님이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며 다니니 로마가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해 온 민족이 망하게 될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로마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지요. 민족을 위한다면 로마의 압제 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을 온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던 말과 예수님이 죽어서 온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유익'이라는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과가 유익이 될지 안될지 따져서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이고 나의 사명이니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무엇이든지 유익하면 한다는 것이 가야바의 논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하면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부상당한채로 독일 군대에 쫓기던 연합군 장교 한 사람이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 숨어 들었습니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그 병사를 지극히 간호해주며 숨겨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독일군이 그 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협박했습니다. 그 장교를 내놓치 않으면 마을 전체를 불사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요. 착한 마을 사람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마을 교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의논했지요. 그 목사님도 참 난감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살리자니 평온한 마을이 풍지박산 나겠고 독일군의 말을 듣자니 그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이 목사님은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 병사를 독일군에게 내 주었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목사님은 양심에 찔리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기도를 계속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 목사님에게 나타나셔서 한 말씀을 해주셨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 때 유익과 무익을 따지기에 앞서 그 부상병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랬으면 네가 어떻게 했어야할지를 알았을텐데 너는 유익과 무익을 따지면서 결정을 내렸구나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유익한지 무익한지 해로운지 아닌지를 묻지 않지요. 다만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령이기에 할 따름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습니다. 내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무슨 유익이 있는 거지?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면 가야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들은 다 유익한 일입니다. 내 생각과 수준이 낮아서 보지 못할 뿐이지요. 그러나 내 생각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예!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유익과 무익을 따지기에 앞서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을 하십시오. 그 결과의 좋고 나쁨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다면 결과가 어찌되었든지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겠지요. 나는 내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하고 신은 신의 일을 합니다.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올리브 나무가 많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예수님은 묶인채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지요. 그들도 잡히면 죽을 것이 뻔한데 대단히 큰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또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 쉽게 집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못해서 대문밖에 서 있었지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만감이 교차했을 거예요. 그 때 요한이 다시 나와 베드로를 데리고 집 안뜰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17절과 18절, 그리고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날이 추워서 종들과 경비병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였다. 그러자 닭이 울었다."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묶인채로 잡혀간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베드로가 받은 '물음'과 '대답'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는 왜 거기까지 따라갔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다 피했는데 베드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갔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밑바닥까지 드러나는 비참한 경험을 합니다. 죽음에 임박한 선생님의 뒤를 따라 갔으면 같이 죽을 각오였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은 피하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요. 여기서 잠깐, 성경에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나중에 여기 나오는 제자들은 나중에 모두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서 피했던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해 놓은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또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교회의 성숙함이 그대로 전해져 뭉클해지지요.
자, 적어도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물음에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난 베드로는 섬찟했을 것입니다. 말은 나도 모르게 순간에 새어 나옵니다. 제가 대학 1학년 시절에 시위에 나선 첫날 이야기를 들려드렸었지요?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틈새'가 없이 자동적으로 반응이 나오는 습성이 무섭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땅을 치고 후회했겠지만 베드로는 이러기를 두 번을 더합니다. 18절에 보면 날이 추워서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운 한 밤중이었을 겁니다.
차라리 여기까지 따라 오지 말았으면 이런 모욕감은 없었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베드로의 때가 아닌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때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을 갔으면, 또 당당히 나도 그 사람의 제자라고 대답하고 예수님과 같이 죽었으면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더 자기 바닥을 보아야했습니다. 그래야 베드로가 되는 것이지요.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런 부끄러움을 겪지 않았겠지만 또한 닭이 우는 새벽을 맞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예! 할 수 있게 되니 다 겪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베드로만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우리는 지금 네가 그 사람이라고 묻는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여기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이런 꿈을 갖지 않고, 이런 것을 몰랐으면,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이리도 마음이 괴롭지 않을텐데요. 목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캐나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여기는 한 지금 우리는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물음에 나는 아니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도 춥고 어두운 한 밤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을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3은 완전수입니다. 딱 세 번 부인했다는 말이 아니라 수천번도 넘게 완전히 부인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기회를 다 박탈당하고 말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러고 나니 곧 닭이 울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를 만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것,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는 끝까지 따르겠다고 자신만만 했더랬습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따르겠다구요. 만일 그랬다면 베드로는 끝까지 자기가 해내었다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나를 움직여야 사랑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니 곧 닭이 울어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설교를 할 수 없고, 내가 악기를 연주할 수 없고, 아 내가 공부를 할 수 없구나를 알면 닭이 우는 아침을 맞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한 그런 아침은 맞이할 수 없고 계속 추운 밤중에 불가에 서서 추위에 떨며 불안한 마음에 사람들 속에 뭍혀서 불만 쬐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추위가 가시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19절에서 21절을 함께 읽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소?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소."
당시에 대제사장이라면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고 모든 일을 다 계획하고 조정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잡혀온 예수님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 보세요. 그는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형식적인 물음이기도 했겠지만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은 이상합니다. 물으려면 모르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이미 대답을 가지고 묻는다면 그것은 물음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은 화가 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분란과 다툼을 일으키는 우리들은 대부분 이렇게 묻고 따지고 부딪히고 있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조정하고 덮어씌우려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은 죽음으로 내 몰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이미 다 드러내었다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미 다 알려주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눈을 들어보면 필요한 것은 다 있고 이미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투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드러내신 분이셨습니다. 꽁수가 없습니다. 그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음모를 꾸미거나 재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숨어서 한 것이 없이 겉과 속이 투명하니 자신이 있습니다. 언제 털려도 먼지 날 걱정 없으니 맘이 편안합니다. 호통도 칠 수 있습니다. 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사람들이, 세상이 내가 말한 것을 다 알게, 내 마음이 보이는 그대로임을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야 편안하지요. 그것이 깨어 있음이고 예수님처럼 사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상담가로서 한국뿐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태기 박사님이 경험하신 뭉클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가 수십 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상담학 지도교수는 발톤이란 분이었는데, 하루는 그의 연구실을 찾아 갔더니 교수님이 정색을 하며 말했답니다. “태기, 나는 자네를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네. 다른 학문을 공부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공부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나?” 세상에....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니. 지난 6년 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답니다. 그러면서 교수님의 바지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을 해볼만도 할 터인데 “OK.”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알았다고는 했지만 화가 나서 연구실을 뛰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뛰쳐 나오면서 연구실 문을 어찌나 세차게 닫았던지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었나 봅니다. 문소리에 놀란 이들이 내다보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만 들어 몸이 떨리고 다리가 휘청거려 간신히 난간을 붙들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다정히 어깨를 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발톤 교수가 부드럽게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기, 자네, 이제 나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미가 조금 보이네.” 사실 그는 이미 6개월 전에도 나를 못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한 학기만 지켜봐 주시면 무언가를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매달렸고, 그렇게 주어진 한 학기의 시간 동안 저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날은 조금은 자신있게 교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수님은 냉정한 표정으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하니,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잠시 동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발톤 교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네, 미국에 뭐하러 왔지? 상담기술 배우러 왔나? 상담기술이라면 내가 책명을 적어 줄 테니 도서관에 가서 그 책들을 읽도록 하게. 아마 다섯 권 정도면 충분할 걸세. 그 책 속에는 자네가 원하는 모든 상담기술들이 다 들어 있을 거야. 그러니 자네가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애기야. 태기 군, 나는 상담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야. 지금까지 자네에게서 진실된 감정과 마음을 끄집어 내보려고 애를 많이 써보았지만 자네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더군. 하지만 계속해서 자네를 건드리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나를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지어보였네. 마음 속으로는 주먹질을 해대면서도 입술로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 그것은 이중성격일세. 6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겠나? 그런데 오늘, 비록 처음으로 자네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네. 이제 자네는 마음을 공부할 수 있는 첫걸음마부터 걷기 시작한 것일세.”
예수님께서 가까이 있는 몇몇들과 무슨 비밀회의를 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속내를 감추고 음모를 꾸미지 않으셨습니다. 빛은 남을 밝히기 전에 먼저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이셨지요.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셨던 분이셨습니다. 겉과 속이 같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니 그에 관하여 그가 한 일에 관하여 심문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요. 대답할 말도 없으려니와 대답할 가치 또한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자신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이건 무슨 일인가요? 22절에서 23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경비병 한 사람이 곁에 서 있다가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를 때렸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
곁에 있던 성전 경비병은 감히 대제사장에게 대드는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다들 그 권위 앞에 비굴하게 고분고분 거렸을 것입니다. 왜?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러면 빰을 맞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비굴하실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뺨을 맞으셨습니다. 또 대부분은 빰을 맞으면 기가 죽을텐데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라구 도리어 호통을 치십니다. 보통의 경우 같으면 한 대 더 맞을 일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왜?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으니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두려운 것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죽을 각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또 이건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셨는데 당신을 치는 경비병에게 다른쪽 빰을 대지 않으신 것은 스스로 어긴 것일까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한번 더 생각나게 해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 원수를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화를 내지 말라거나 화를 내라는 말씀은 아니었지요.
세상에 가장 바보같은 사람은 나 화가 나 있는데도 화가 난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속은 화가 들끓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화병이지요. 숨기고 감추고 사는데 익숙해서 정말 화가 나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바보같은 사람은 화가 나면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느낌을 알아 좋지만 화를 내다가화에 붙잡혀서 화가 화를 내게 해 어느 순간 왜 화를 내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리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면 화를 다스릴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극과 반응의 틈새를 넓게 해서 사는 사람이지요. 화를 마음대로 조절합니다. 이번에는 이만큼 화를 내고 다음에는 조금 더 화를 내고 그러면서 자유자재로 화를 에너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화를 내도 화가 어쩌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화를 낼 때는 내되 화에 지배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몇시간 전만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 아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니요.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 모습이 눈부시게 바뀌었을 때에도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면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귀를 달고 있었지만 자기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머리를 지니고 있지만 아무 것도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늘 깨어 있기를 가르치셨는데 말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새벽닭 울음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닭은 드디어 울었고 베드로의 어두운 밤은 끝났지요. 문득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잠에서 깨어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깨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 일 밖에는 다른 무슨 할 일이 없었지요. 주님께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상관없니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서 다만 황송할 따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보시는 주님 앞에서 수치스런 밤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다 아시니까요. 귀만 기울이면 됩니다. 그러면 닭이 울어 새벽이 온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닭이 울어 새 아침을 맞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은 닭이 울어 맞이하는 새 아침입니다.

(기도)

하나님, 이것이 내게 유익한지 무익한지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를 분별하게 하시고 용기와 힘을 다해 해야할 일을 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네가 그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 하여 추운 밤을 살아가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닭이 우는 아침을 맞아 회개하고 돌이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처럼 감추고 숨기는 것이 없이 당당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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