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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19:31~42 ( 120318)
2012/5/6(일)
주일 낮예배 :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본문 : 요한복음 19장 31절~ 42절
제목 :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일시 : 2012년 3월 18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19장 42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42 Because it was the Jewish day of Preparation and since the tomb was nearby, they laid Jesus there.

어린이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그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고 무덤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거기에 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낼 사람들이 없었어요. 다들 무서워서 숨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고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어린이 여러분도 그렇게 준비가 되고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목 마르다’고 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는데도 목이 마릅니다. 아니, 목이 마르니 갈망하고 염원하게 되고, 애타게 기도하고 수고하니 다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우리 삶에 목이 마르자고 했습니다. 목이 말라본 사람은 압니다. 커서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어린시절 소풍을 가거나 멀리 갈 때 목이 말라 죽을 것같았던 기억이 종종 있습니다. 물만 주면 뭐든지 할 것같은 순간들, 그래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주는 물은 마셔도 또 목이 마릅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니 성경도 남이 읽어주고 가르쳐주는 성경이 아니라 내가 읽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철학도 책에서 읽은 남의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물어 만난 그것이어야 하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이고 비참한 최후이겠지만 예수님께는 다 이루신 삶이었습니다. 갈증을 다 채우셨으니 그렇습니다. 세상에 와서 자신에게 있는 남은 하나까지 다 주어서 그가 온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Desi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신으로부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Design도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신의 의도’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삶에서 다 이루려면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욕구 Desire,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 그것을 Design하여 이루는 것이 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신 후에 유대 사람들은 그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어서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말고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갑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1년에 한번 있는 성스러운 명절, 그네들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이즈음 이곳의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을 거예요.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라고 합니다.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옛날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그들의 조상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이집트를 탈출하여 나올 때 이집트 왕 파라오는 그들의 길을 막았었지요.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의 모든 생명의 첫째는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 이집트의 모든 집안의 장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인 히브리인들도 이집트에 살고 있어 마찬가지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어귀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넘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날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이 유월절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주는 절기이니 이 날이 그네들의 종교적, 문화적으로 최고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런 성스러운 유월절을 준비하는 안식일이니 시체를 사람들이 다 보는 언덕에 달아두는 것은 부정을 탄다고 생각을 해서 시체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꺾는 것은 그 사람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다리를 꺾으면 십자가에 달려 숨이 넘어가던 사람들이 빨리 죽게 되고 혹여 살았어도 도망을 치지 못하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 확실해서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33절과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 와서는 그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창으로 찌르면 살아 있는 사람은 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피와 물이 섞여서 흘러 나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죽었다는 것이지요.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 때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병사는 눈이 멀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솟구쳐서 그의 눈을 적시고 그의 눈이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명력을 자신을 찌른 대적에게 전해주는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다해서 사는 그런 사랑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37절에 스가랴 12장 10절을 인용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 볼 것이라는 말씀도 있다는 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36절도 함께 읽어볼까요?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46절과 민수기 9장 12절, 시편 34편 20절 등에 미리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을 함께 볼까요? “어느 집이든지 고기는 한 집에서 먹어야 하며 그 고기를 조금이라도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서는 안된다. 뼈는 하나라도 꺾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율법의 한 부분입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먹는데, 뼈는 꺾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왜 뼈를 꺾지 말라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편 34편 19절과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뼈마디 하나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아무 죄가 없이 그 피를 흘려서 히브리인들을 죽음의 재앙에서 구해낸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희생제물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것이겠지요. 그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뼈도 꺾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양의 피에 죽음을 막는 화학 성분이나 무슨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사실은 그 때 히브리인들을 구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압제 아래서 통곡하던 히브리인들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것이지요.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흘려서 그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을 위해,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죄 없이 흘려진 많은 피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아지고 변화되고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가운데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시체를 치워달라고 하는 것, 뼈를 꺾고 창으로 찌르는 것까지도 이미 오랜 세월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느 하나 낭비나 우연이 없는 것이지요. 사실은 온 우주가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합니다. 다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가니 어둡고 답답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때도 그러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져가고 있는 신비를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은 늘 우리와 함께입니다.

함께 이어지는 38절과 39절을 읽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왔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고 안식일이 다가와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그러면 장례를 치뤄야 하는데 단지 여자 넷과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너무나 쓸쓸한 모습입니다. 혈기왕성하던 열두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과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아무 죄없이 죽으면서 게다가 이토록 쓸쓸한 장례를 맞으셔야 하다니, 더더욱 예수님의 죽음이 가슴 아프지요. 사람들은 착하고 의롭게 살면 영광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예수님은 죽어서도 영광이 비껴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걸으신 섬김의 길은 이처럼 마지막까지도 철저한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미리 준비가 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고 아주 부자였다고 전해집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위치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드러내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홀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의 죽음을 맞이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간 판에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지켜왔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던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자 율법학자였는데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장례식에 향료를 백근이나 가지고 나타나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그러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 왕에게 박해를 받아 죽자 예수님은 숨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서 그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때를 만나고 때에 따라 사는 것이지요.
42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두 사람 덕분에 예수님의 남은 몸은 당시의 풍속대로 나마 향료와 함께 삼베에 감겨 동산에 있는 새 무덤에 모셔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그 무덤 역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를 위해 준비한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가 되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처럼 때에 맞게 등장해 살 수 있는 비결을 돌아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내고 무덤에 모실 수 있었을까요? 아리마대 요셉은 새 무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가 부자였기에 가능했지요. 비겁하다 여겨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어쩌면 그런 자리를 나와서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온갖 유혹과 시련을 다 견디어내면서 믿음을 지키기란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때를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정하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잠을 잘 때 눈을 감지 않는다. 죽을 때도 눈을 뜨고 죽는다. 그래서 산사(山寺) 풍경의 추는 물고기 모양으로 되어 있다던가. 늘 깨어 있으라고.” 잠 잘 때에도,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늘 깨어 살아갈 때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때를 맞이하는 것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기에게 올 위험을 계산했다면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밤 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찾아왔던 니고데모 역시 그러하지요. 이방인의 왕비가 되어 살아가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를 내어 자기 백성을 위기에서 구했던 에스더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때에 맞게 등장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정성,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남들이 드러내어 예수님을 모시고 따라다닐 때는 숨죽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사랑과 정성을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다 떠나고 대세가 아닐 때에 오히려 용기있는 선택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정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제 죽어서 아무 힘이 없는 시체로 남은 선생님의 남은 몸을 위해 선뜻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이고, 진짜 정성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하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의 때를 분별하고 그 날을 준비하는 믿음과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의 삶의 바뀌어진 것이지요. 숨어 있던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마리아, 선생님을 잃은 요한이지만 그 대신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그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가야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더 큰 일을 하실 것이라 하셨지요. 아브라함이 죽으니 그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만나도 형통할 것이고 우리는 염려와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믿고 또 나를 믿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가 숨을 거두신 뒤에... 하늘같이 믿었던 선생님을 보내고 남은 이들에게 얼마나 그 빈자리가 컸을까요?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당황스럽고, 또 앞으로 어찌 살아야할까 가야할 길이 막막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선생님을 지키겠다고 큰 소리를 치던 제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이들조차도 숨죽이고 도망쳐버린 빈자리가 공허하기만 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런 자리에 등장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임에도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숨기고 있던 사람이었지요. 유대의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그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예수를 따르는 길도 버리지 못하고 비겁하게 우왕좌왕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를 깨어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제자들은 도망가게 했지만 어떤 제자는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반역자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예수의 시신을 감히 거두게 해달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다 버리고 드러내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때가 있고, 숨어서 예수의 진정을 사모하며 따르던 제가가 등장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일은 섣불리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가 보고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준비된 삶, 참된 믿음, 용기와 사랑으로 예수님을 모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다 이루시기 위해 물과 피를 다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 저희들을 위한 구속의 선물로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저희들의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늘 함께하시고 넘어갈 힘과 용기를 주심을 기억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무서워서 눈치보며 숨어 있지 않게 하시고 용기 내어 준비된 저들의 무덤에 주님을 모시는 용기와 힘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지나간 이로가 시간에 매달려 있지 않고 필요한 때에 정확하게 나타나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참된 부활을 경험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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