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산의 길 위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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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창1:3~13 (eastsain@chollian.net) ( 111204)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1/12/12(월)
주일 낮예배 : 나누셔서  


본문 : 창세기 1장 3절~13절
제목 : 나누셔서
일시 : 2011년 12월 4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4절과 5절 말씀을 영어로 다시 읽어 볼까요?
4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and He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5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first day.

하나님은 어떤 분? God saw! 하나님은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셨지요? the light 빛을 보셨습니다. 빛을 보시니 Good했어요.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좋아하셨어요. 지금 하나님이 어린이 여러분을 보시면 어떨까요? 네. 하나님은 어린이 여러분을 보시고도 좋았다고 하실 거예요. 그렇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어 있게 하셨으니 좋다고 하시지요.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좋게 살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믿음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어둠에서 빛을 separate하셨어요. 나누어 놓으셨다는 거지요. 그리고는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뿐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거예요. 낮이니 밤이니 하는 것은 불러지는 이름이니까 그것 자체가 좋고 나쁘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요. 여러분이 공부를 좋다고 하면 좋을 거예요. 공부를 싫다고 하면 싫어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해서 그렇게 불러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여러분 곁에 있는 것들을 이름을 붙여 보세요. 참 좋은 세상입니다.

(설교)

창세기는 출애굽을 앞둔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살아온 길과 가야할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그네들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노예로 살면 되지 않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의심과 절망에 사로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노예살이에서,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하루 하루 희망 없이 어둠과 혼돈 속에 살아가는 삶에 하늘의 소리를 들려주는 복음이 창세기입니다. 태초는 지나간 옛날의 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먼저와 나중이라는 크로노스, 연대기적인 시간의 양도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로 태초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지금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도 그렇게 지금 나의 삶을 창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와 같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우리 위에 움직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에 어둠과 혼돈과 공허가 찾아올 때 우리가 믿어야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3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세상과 소통하시지요. 그리스 철학에 능통한 요한은 이를 'Logos'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온 것,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오신 성탄을 기념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입니다. 성탄, 이렇게 우리는 찾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매일 매일이 크리스마스랍니다.
어느 분은 말씀은 '말'을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이루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말로 끝나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지요.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깔린 곳에 함께하신 하나님이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하셔서 빛이 생겼습니다. 빛은 희망입니다. 빛을 빼앗겨본 사람, 절망과 어둠의 그 끝에 이르러본 사람은 압니다. 그가 빛을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빛을 보아도 빛인지 모릅니다. 빛은 ‘말씀’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때 그러하셨다면 지금 나도 빛이 생겨라! '말씀'하면 빛이 생길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고 '말'만하고 의심하고 후회하고 원망하면 거기까지입니다. 어둠, 혼돈과 공허 속에 사는 것이지요.
4절과 5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앞서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절망의 끝자락에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빛이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세상을 보여주신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빛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다 좋습니다. 나쁜 것이 없는 것이지요. 아니 좋고 나쁘다는 가치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는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대적인 가치는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 다만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어둠을 밤이라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밤과 낮, 이름일 뿐이지요. 그것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은 어둠이고 빛은 빛입니다. 낮은 낮대로 좋고 어둠은 어둠대로 좋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습니다. 상대입니다. 저녁이 없이 어찌 아침이 오겠습니까? 아침만이 있다면 아침을 만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도 '일음일양'을 '도'라고 말합니다.(一陰一陽 爲之道) 한번 어두우면 또 한번 밝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삶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밤이었습니다. 해가 지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시작해서 어둠을 지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하루라는 것입니다.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는 하루, 그런 하루를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저녁이 있어 아침이 있습니다. 저녁이 없이 아침이 올 수 없는 것이지요. 슬픔이 있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누신 세상에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주인이고 어둠의 주인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내가 이름 붙이는대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 8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을 만드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2절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물은 죽음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혼돈이고 공허이고 어둠이었지요. 또한 물에서는 그런 것까지 죽으니 인식의 전환과 부활, 개벽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지요.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물이 없어 목이 말라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물로 깨끗해지고 그 물로 생기를 얻는 것이지요. 이제 하나님은 그 물 한가운데 창공을 만들어 물과 물 사이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In that space lies our freedom and power to choose our response. In our response lies our growth and our happiness.' 우리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틈이 없어 다투고 부딪힙니다. 자극과 반응의 틈새에 내 반응을 선택할 힘과 자유가 있습니다. 나의 반응에 나의 성장과 행복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 틈새에 창공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늘입니다. 물과 물 사이의 그 틈과 공간이 넓을수록 여유있고 부유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둘째날에 이렇게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하늘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잃어버리고 무시해온 공간이 있고, 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그 틈새, 하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회복인 것입니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국시대 위나라에 포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포정은 문혜군의 주방장이었답니다. 그는 소를 잡는데 도통한 사람으로 솜씨가 어찌나 좋던지 무려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아도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감탄한 문혜군이 그 경지에 이르는 비결이 무엇인지 묻자 포정이 말했습니다. “소인은 항상 도를 위해 몸바쳤습니다. 도는 단순한 기술보다 고상하지요. 제가 처음 소를 잡았을 때는 소 전체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 정도 지나니 소를 보지 않게 되더군요. 지금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봅니다. 육감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오직 마음으로 일을 하지요. 그래서 소의 신체 구조를 따라 뼈 마디와 마디 사이로 칼날을 놀립니다. 자연히 살점과 심줄을 건드리지도 않고 큰 뼈를 다치지도 않지요.”
포정은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한 번도 칼을 바꾸지 않은 비결은 뼈마디에 있는 틈새로 얇디얇은 식칼의 날을 밀어 넣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포정은 뼈와 살 사이의 공간을 보았던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니 안된다고 할 때 그 막막함 속에서 공간의 틈새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달인입니다. 부자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일수록 집도, 자동차도, 건물도 땅도 크고 넓습니다. 보이는 세계이건 보이지 않는 세계이건 공간의 지평이 넓은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내면의 공간을 넓고 깊게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명상과 기도는 세상의 소음에 문을 닫고 자기 내면의 틈을 열어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내가 잃어버리고 무시하고 있던 공간 속에서 나를 만나는 일이지요. 앞일에 대해 걱정하느라 여념 없던 내 머리가 쉬게 되고 후회와 질책에 시달리던 가슴이 고요해지며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공간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을 채우고 있느냐를 살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셔서 그 틈에 공간, 창공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공을 하늘이라고 이름을 붙이셨지요.

자, 이어지는 세 번째 날의 이야기인 9절과 13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서 하늘 아래에 있는 물과 하늘 위에 있는 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게 하셔서 땅과 바다가 나누어지게 하셨습니다. 물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상징은 우리의 생각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해보면 우리의 생각이 일초에도 수없이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다만 고요해지지 않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요. 우리는 그 많은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한 생각에 내가 묶여서 노예처럼 끌려 다니지요. 내가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는 그 생각이 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둠 속에 사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면 내가 그것들을 마음대로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그것들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의 물은 3차원, 상대세계이고 하늘 위의 물은 4차원, 절대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식의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육의 세계이고, 하늘 위의 물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영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나누어진 분리를 구분하지 못해 문제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고 지각하고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1%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은 99%의 세계가 있는데 1%가 전부라고 고집하고 사니 어리석은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하늘 아래 물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놓으신 하늘 위의 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땅에 하나님께서 식물과 나무가 그 종류대로 돋아나라고 하시니 그대로 되었지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렇게 해서 땅의 세계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어디나 다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나누시고 또 거기에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혼돈과 슬픔, 공허함과 어두움이라는 ‘낯설음’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애굽의 고난 속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사실은 오늘 나의 고난의 때가 창조의 때, 출애굽의 시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깨어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두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 말하는 것과 글로 써보는 것이 다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보고 써보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도 말해보는 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말'만하고 의심하고 후회하고 원망만하면 거기까지입니다. 어둠, 혼돈과 공허 속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는 것은 빛과 어둠을 나누지 못하고 구분하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하늘 아래 물을 나누셔서 땅을 만드시고 그 위에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막힌 삶에 하늘을 만드셔서 생명의 푸른 움이 돋아나게 하시기를, 우리 또한 이 말씀대로 살아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을 주신 것처럼 저희들도 입을 열어 말하게 하옵소서. 또한 말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살아 빛이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빛과 하늘과 바다와 땅을 주셨으니 저들도 눈을 열어 좋은 세상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들의 마른 땅에 단비를 만나고 푸른 움이 돋는 참된 나의 성탄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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