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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18:1~11 ( 111127)
2011/12/6(화)
주일 낮예배 : 내가 그 사람이다!  


본문 : 요한복음 18장 1절~11절
제목 : 내가 그 사람이다.
일시 : 2011년 11월 27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와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8절과 9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9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때가 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잡으러 왔어요.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앞에 나서서 다른 제자들은 다 돌려보내라고 하신 거예요. 아직 제자들이 잡혀갈 때가 되지 않았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도 잡혀갈까봐 염려하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피해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고 누명을 씌우고 비겁하게 숨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지요.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거예요. 도와주시구요. 그러니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잊지 않는 어린이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래요. 또 내가 해야할 일을 해야할 때에 비겁하게 뒤에 숨지 말고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나서서 할 말을 하고 할 일을 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설교)

지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었지요. 내 영광,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이 있습니다. 영광은 받은 것이어서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급일 수 없는데 같이 대해주면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과 하나이니 그 아니 영광스러울 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삶에 낙심이 찾아오고 이해할 수 없는 우울과 슬픔을 이길 길이 없어 보일 때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와 하나님이 하나인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그 나를 세상에 보내어주시고 사랑하셨으니 우리 또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애하는 가슴과 눈빛으로 사랑하며 살아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는 한 주간이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고 십자가를 받으시는 과정과 그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함께 18장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면 늘 가시던 곳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산지에 있는데 그 아래 기드론 골짜기 건너에 올리브 나무로 가득한 겟세마네 동산이 그곳이었지요. 지금도 그곳에 가면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의 올리브 나무라고 이천년이 넘은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이 건너다 보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곳을 이 땅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계실 마지막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면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싶으신지요?
지금 예수님은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뜻을 돌아보며 제자들과 나누던 그곳을 예수님은 다시 가고 싶으셨지요. 예수님은 마지막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평소에 하던 그대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늘 제일 하고 싶은, 최고의 선택을 하며 후회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고 나서 늘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여기며 정말 하고 싶은 그것을 즐기며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에도 짧은 삶이랍니다. Now or Never! 지금 아니면 이 다음은 없습니다. 이 다음에 할꺼야. 이 다음에는 행복할꺼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이 다음을 찾으며 천국을 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절과 3절입니다.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실지 유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선생님이 기도하러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으면 유다 역시 함께 기도하러 갔어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그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위치와 할 일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지요.
지금 유다에게는 아는 것이 병이 되었습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자기 식대로 사랑한 것이지요. 그럴려면 아예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독일의 여류 작가가 소설형식으로 쓴 책인데, 예수님의 일대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저에게 인상 깊게 남은 부분이 오늘 이 장면입니다. 여기서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은 그윽한 눈이었습니다. 슬픔이 가득했지만, 원망이나 비난은 눈꼽만큼도 없는 선하신 눈으로 그려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사랑하는 제자의 그 곤혹한 처지까지 다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안타깝게도 그런 예수님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신을 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으로 받을 수 있는 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감동과 감격적인 장면이었지요. 여러분, 누가 나를 배신하겠습니까? 배신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관계도 없고 기대도 없고 사랑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배신감이 찾아오면 알아차릴 일입니다. 아, 내가 사랑하고 있구나! 더 나아가서 배신감이란 내가 배신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됩니다. 아무도 나를 상처주고 괴롭힐 수 없습니다. 괴롭히는 것은 ‘나’입니다. 사실은 배신한 그도 ‘나’이고, 그것으로 힘들어하는 ‘나’도 나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주신 일이라 여기며 사랑의 선택을 할 때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길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유다는 무엇 때문에 무장한 군대를 데리고 왔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하속들에게 등과 횃불을 들려가지고 왔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이 때 동원된 로마 군대 부대장은 천부장이었고 부대 수는 600명이었다고 합니다. 고작 무장도 하지 않은 열힌명의 민간인들 사이에 있는 한명을 체포하기 위한 그들의 거창한 행장은 그들 내면에 숨겨져 있는 무력감과 두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장한 군대 앞에 홀로 나서며 ‘나’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살고자 하는 자들의 초라함과 하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의 당당함이 이렇게 선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아시는지요?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햇빛을 쫒아서, 꿈과 희망을 쫒아, 사랑을 따라 왔는데 그것이 이제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려 있다는 거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상황,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 무력감에 서성이고 있을 때 윤동주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윤동주가 보기에 예수님은 괴로웠지만 행복한 사람이었지요. 마침내 십자가가 허락된 예수님은 참으로 행복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하늘 아버지 앞에 홀로 서 있는 그 앞에는 무장한 군대의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번뜩이는 횃불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함께 4절에서 6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셨다고 했습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 살면 두렵지 않습니다. 몰라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알면 다 사랑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신 말씀처럼 알면 자유롭습니다. 영화나 소설을 볼 때 우리는 떨어져서 보고 결과를 알고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습니까? 그러나 결과를 모르면 손에 땀을 쥐고 두렵고 떨립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게 되면 어떤 일이든지 그렇습니다. 믿음은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그 삶의 수준과 질이 달라지지요.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알고 받아들이신 예수님은 앞으로 나섰습니다. 알고도 나서는 사람이 있고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서지 못하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몇 년전 예가에서 스토리텔링을 할 때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이야기입니다. 한슬이 만한 때였겠네요. 젊은 혈기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정의감으로 가두시위에 나섰던 첫날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백골단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아저씨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빌었더랬습니다. 백골단들이 그 말을 들었을지 듣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들었다면 얼마나 비웃었겠어요. 들렸든 들리지 않았든 저는 그대로 닭장차에 실려서 경찰서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주일날에 교회에 가지 못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었더랬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한참동안 부끄러움과 후회에 치를 떨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달라졌지요. 대학 4학년 때 6개월 동안 수배를 당하다 학교 앞에서 연행 될 때도 전경들이나 형사들이 놀랄 정도로 당당했더랬습니다. 연행하고 취조하던 그네들이 더 초라해 보일 정도였지요.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면 그렇게 초라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앞으로 나서신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물으시지요.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무기를 들고 잡으러 온 사람인지 누가 잡히는 사람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오늘 예수님을 따라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물음이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금 물어주시는 물음입니다. 물음 앞에 서 봅니다. 지금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지금 무엇을 찾아 이토록 애쓰고 계십니까? 또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배회하고 있는지 그렇게 물어주시니 그들은 허탈하게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누구를 찾고 있는지, 왜 그러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사니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은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윤동주가 노래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괴로웠지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 역시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아 괴로웠던 사람에서 행복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 일,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고 하늘 아버지 앞에 홀로 서게 되자 그 앞에 찾아온 대적들, 무장한 군대의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번뜩이는 횃불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네들이 주눅이 들어 물러나 땅에 쓰러집니다. 수갑에 채여 연행되고 취조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내가 한 일을 말하니 제 앞에 있던 그들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 사람입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였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이 ‘나((I AM)'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는 어쩔 수 있지만 아버지와 하나된 나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를 붙잡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지만 아버지 안에 있는 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태어난 적이 없고 죽을 일도 없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우리도 세상이 네가 그 사람이냐고,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내가 그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허겁지겁 살면 할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당황해서 핑계를 대고 뒤로 물러나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지요. 또한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물러나서 땅에 쓰러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처럼 여러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7절에서 9절을 함께 읽습니다.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나인데 횃불과 무기를 들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늘 여기에 있는데 사람들은 나를 찾겠다고 다른 데서 방황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나를 잃어버렸다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잃어버리고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일 뿐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면 여전히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나와 함께 있으면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이고 사랑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하나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보냄을 받은 것이지요. 보내신 이인 아버지를 기억하고 보내신 이의 일, 사명을 발견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한 제자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때가 되지 않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그 때를 만나도록 지키시고 돌아보시는 사랑입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안식일도 성전도 다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상처받고 힘들어하게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닌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좌충우돌했는지 모릅니다. 남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사랑한다 하면서 간섭했고, 위한다고 하면서 이용했었는지 모릅니다. 간섭과 이용, 요구가 사랑인줄 알고 살았던 시절이 서글픕니다.
그런 내가 이제 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혹시 실패한다 할지라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나의 본분이요 사명입니다. 그렇지 않는 삶은 기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무엇을 하든지 온전한 사랑이 되어 사랑하며 살기를 다짐하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거룩한 탄생, 성탄입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10절과 11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베드로는 그 때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칼을 뽑아 적의 귀를 자르는 힘차고 용감한 베드로의 모습이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지키고자 칼을 뽑았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일이었습니다. 칼을 다시 꽂으라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어땠을까요?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고 기가 죽어 버리고 낙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베드로가 베드로 되게 한 은총입니다. 사람의 힘, 혈기가 모두 탕진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당신의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칼을 빼들고 설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는다고 이것은 아니라고 이러저리 애쓰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에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을 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똑똑히 보고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쓴잔을 마셔야 인생을 알 수 있습니다. 독하고 쓰디쓴 술을 마신 사람만이 취하게 되듯이 지금 내가 마시는 이 쓴잔을 마셔야 내 삶에 취해서 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대신 마신 술에 내가 취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연습을 하지 않고 연주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전도에 집중하지 않고 전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나를 위하여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니 그 사랑에 취해서 살아야하지요.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으러, 자기를 잡으러 온 이들에게 자기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용기이기도 하지만, 순종이셨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일, 경험하는 일도, 내가 원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는 고백, 그것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지, “아니요”는 없습니다. 늘 내게 필요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 안에 고통도 은혜입니다. 선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생각같으면 베드로처럼 칼을 빼들어 싸우고 싶지만,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내 힘과 계획, 내 욕망과 욕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사명, 자신의 십자가를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내가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것을 받아들이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들의 눈을 열고 믿음을 주셔서 내가 그 사람임을 알리고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사랑이 저희들 가운데 있어 우리에게 주신 모두를, 모든 일들을 사랑하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내 생각과 판단으로 칼을 들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의 잔을 받아 마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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