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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창1:1~2 ( 111120)
2011/11/27(일)
주일 낮예배 : 태초에  


본문 : 창세기 1장 1절~2절
제목 : 태초에
일시 : 2011년 11월 20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

어린이 여러분, 함께 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씀에 어린이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읽어 봅니다. ‘천지’대신에 이름을 넣는 겁니다. 자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셨듯이 에릭이를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왜 세상에 왔고, 왜 학교에 다닐까요? 한국에 레드스쿨에서 어떤 학생이 선생님이 공부를 하라고 하니까 왜 공부해야하냐고 대들었다가 큰 낭패를 당했답니다. 레드에서는 공부하기 싫으면 화이트 스쿨이라고 해서 일을 시킵니다. 하루만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나면 공부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이 공부할 기회를 주셨으니 공부하는 겁니다. 선물을 받은 거지요. 여러분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하나님이 살 목적을 주신 거지요.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캐나다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과 여러분을 창조하셨듯이 오늘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여러분은 하루를 살고 창조해 가는 겁니다.

(설교)

우리 인류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한 두 가지 여행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우주로의 여행입니다. 우주를 향한 인류의 관심이 현대 과학을 발판으로 달과 별을 찾아 떠나게 해주었지요. 그런데 이 우주로의 여행은 가면 갈수록 끝이 없는 여행이 되고 있습니다. 우주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니 더욱 그렇습니다. 탐험하면 탐험할수록 더 넓어져가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이 발견되는 것이 우주여행입니다.
또 하나의 여행은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바깥인 우주를 향한 관심과 더불어 20세기가 되어서야 사람의 내면, 진짜 내가 누구인지 탐구하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수 천년전부터 종교와 영성의 전통에서 마음을 다루어 왔지만 그것은 제한된 소수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 보편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지요. 사실은 이 마음으로의 여행이 우주여행보다 더 멀고 험하고 신비한 여행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처럼 말입니다. 우주보다 더 큰, 아니 우주를 품은 우리 존재를 알아가는 여행이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왜 읽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내 삶의 거울이 되는 경전으로, 영적인 양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저는 그런 이유들과 더불어 성경을 읽음으로 내 생각에 빠지지 않고 더 큰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입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말로하면 성경이 마음, 하나님께로의 여행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다간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그들이 갔던 길과 그 길에서 만난 하나님을 전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부터 함께 읽어가려고 하는 창세기는 우리 삶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순서에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처음 쓰여진 책은 아닙니다. 처음 쓰여진 책은 출애굽기이지요. 그런데도 창세기가 성경의 처음에 있는 것은 역사적인 순서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들과 물음들이 이 안에 다 있기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쓴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지요. 이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쓴 창세기는 출애굽 당시의 정황과 물음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출애굽을 하면서 왜 우리는 애굽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지, 이 땅에 억압과 불의와 다툼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세상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사람은 누구인지, 이런 세상의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지, 선과 악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하고, 출애굽을 왜 해야 하는지를 찾으면서 창세기가 기록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인류의 시작에 대한 기록, 조상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고, 인류의 조상들이자 이 책을 읽는 오늘 나 자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의 책인 창세기에서 내 이야기를 만나고, 내 물음이 해결되면서 우리의 문제가 다 풀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세기가 나의 창세기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하는지,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1장의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먼저 태초에 세상과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나는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하셨다."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며, '왜 살지?'라고 묻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하늘의 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셨고 그가 나의 후견인이라는 것이지요. 어린이 설교에서 말씀을 나누었듯이 그저 우연히 의미 없이 목적이 없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셔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캐나다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오늘을 삽니다. 오늘 나의 삶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지혜는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성의 제1 원리라고 말씀드렸지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다 뜻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재앙이나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것을 이길 힘을, 그런 어려움의 순간을 넘어설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믿음에 있을 때에 좋은 것 싫은 것, 사랑하는 것 사랑하지 않은 것,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들고 있는 허상임을 보게 되지요. 그리고 달지 않지만 그것이 필요한 것임을 깨달을 때, 내 입에 달지 않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고난은 싸워 이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역경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좌절은 뛰어넘으라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맑은 눈 뜨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믿음의 눈을 떠서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 나의 스승이요, 내가 반드시 경험해야할 사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비는 신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러할 때에 어떤 어려움, 어떤 힘듦이 찾아온다하더라도 반갑게 맞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산다."는 것이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출애굽의 절박한 처지에서 가나안을 찾아 떠나던 그들에게 가장 큰 힘과 믿음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이 창세기 1장 1절은 신비한 네 단어, 낯선 언어로 이루어 있습니다. <태초>와 <하나님>, <천지>와 <창조>가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여기지는 이 네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의 무지함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사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속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가 언제일까요? 태초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이 전부인줄 아는 눈으로는 알 수 없는 거지요. 태초는 처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초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낯설음’입니다. 낯설다는 것은 두려움이고 어색함입니다. 그런데, 이 낯설음을 지나야만 구원, 자유와 해방과 감사가 있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낯설음이 있습니다. ‘태초’가 있습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할 때 늘 낯설고 두렵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들이 그랬고, 독립군들이 그랬습니다. 낯설음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무엇인가를 이루어가는 시작이 태초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1장 1절은 오늘 우리를 낯설음으로 가게 하는 물음의 시작입니다. 태초가 어디인지, 우리는 그 태초, 시작을 찾아 가야 합니다. 두려워서 숨지 말아야 합니다. 피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요.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를 산채로 도시로 운반할 때 수조에 ‘꽃게’와 같이 운반한다고 합니다. 꽃게의 집게가 오징어를 건드릴 때 오징어는 죽지 않고 살아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징어는 도시로 오기도 전에 죽어버리게 된다고 하지요. 포도송이가 썩지 않고 발효가 되어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압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상황과 처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그것을 통해 변화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의 낯설음이 무엇인지, 나의 가정, 나의 일에서 낯설음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학교 가는 것, 이사 가는 것, 공부를 시작하는 것, 외국에 나가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 결혼하는 것이 다 낯설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는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나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렇게 ‘예!'로 응답하는 것,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태초, 지금을 만나는 비결입니다.

그런 태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 홀로 있다면 태초는 두려움이 되고, 그 태초를 벗어나서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시간과 공간과 생각의 제약 속에 있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꼴과 같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손으로 만지면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를 더듬는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처럼 생겼다고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천장이라고, 등을 쓰다듬는 사람은 벽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자신의 제한된 경험 속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말하기 전에 우리가 앞서 알아야할 것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비이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신 것 가운데 하나가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계명에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하나님’을 지칭할 수 없어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지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생각일 뿐입니다.
성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음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를 가지고 평생을 싸우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교단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면 어떻고 하느님이면 어떻습니까? 영어로는 God이고, 한자로는 天主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름 지어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을까요? 내 생각에 하나님이 있으면 없는 하나님이 생기는 것일까요? 내 생각의 차원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그 틈을 비집어 만날 수 있는, 그 틈을 확장시켜 가는 것이 깨달음이고 지금 여기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과 함께이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 처음 시작에,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낯설음에, 두려움에 그 하나님이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잃고 살아가니 인생이 고달픕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삽니다. 그렇게 계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시편23편) 목자는 가장 선한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힘이 되십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의 섭리,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 믿음으로 살아갈 때, 나는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그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나의 낯설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태초에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천지와 창조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단어입니다. 하늘은 무엇이고 땅은 어디인가요? 창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수는 창작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은퇴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시작에서 나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나는 그 하나님을 따라서 지금 나의 낯설음에서 나의 하늘과 땅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시작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의 인생은 지극히 우연하게 태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또 어떤 이의 인생은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섭리가 있음을 분명히 알며, 그 뜻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인 성경에 창세기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시작이 바로 이것,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함께 2절을 다시 읽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에 무엇이 있었나요? 태초, 그 낯설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런 태초, 낯설음,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내가 창조를 시작하는 자리도 그러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그런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깊어갈수록 하나님의 일은 시작되고 움직이신다는 고백입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깝습니다. 새벽 여명 직전이 가장 어둡지요. 그러니 지금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어두음, 그 낯설음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지금이 출애굽의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과 함께이셨듯이 오늘 나와도 함께하십니다. 연애를 시작할 때 어떻습니까? 사랑을 고백할 때 경험담을 말씀해 보세요. 조마조마하고 두렵습니다. 의심이 가고 염려스럽습니다. 혼란스럽고 공허합니다. 그런다고 멈추게 되면 거기까지인데 그것을 넘으면 사랑이 시작되지요.
이렇게 창조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의 영은 그런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있는 그것은 창조의 기회입니다. 출애굽을 하려하니 얼마나 혼돈스러웠을까요? 지금까지 익숙해 있고, 그것이 다 인줄로 알았는데 새로운 세계로 또 나가라니 얼마나 두렵고 공허했을까요? 아니라고 합니다. 이게 아니라고 합니다. 또 다 비우고 내 내어 놓아야하니 공허합니다. 그래서 답답한 어둠이 깔립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를 쓴 히브리인들의 전통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어둠 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막 종교입니다. 사막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알지요. 아니 사막까지 가보지 않아도 산에서 맞는 밤도 그렇습니다. 그 어둠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이 어두움, 깊음이 그러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물은 죽음입니다. 또 인식의 전환과 부활, 개벽입니다. 출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은 홍해(물)를 건너고, 요단강(물)을 건너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기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도 당신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니 새 하늘이 열렸지요. 그런 물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물 위에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많이 혼돈스럽고 공허하고 어둡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태초이고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거기에서 시작하였으니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렇게 지독한 낯설음, 공허와 혼돈, 어둠이야말로 창조의 징조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조, 우리의 시작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 나의 삶의 창조를, 출애굽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만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만히 창세기를 쓰는 모세의 마음이 되어 봅니다. 출애굽을 앞둔 모세와 히브리인들, 애굽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모순의 노예살이를 하던 그들이 그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떠나는 길의 이정표가 되는 첫 말씀인 것이지요. 성경에서 떠난다는 것은 믿음과 거의 동의어로 쓰여집니다. 믿음은 머리로 앉아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떠나볼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듯이 이제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의 삶을 작품하고 창조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사실 태초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넘어선 세계의 소식을 전하는 성경에서 태초는 더욱 그렇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는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카이로스는 전혀 다른 시간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지금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듯이 그의 형상인 나도 나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출애굽입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떠나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아니, 늘 그렇게 떠나는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창조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삶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지금 저희를 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후회와 원망이 아니고,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도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주신 삶을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많이 혼돈스럽고 어둡고 공허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움직이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런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두려워 숨지 않게 하시고 그 위에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을 보고 맞이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의 시작, 낯설음에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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