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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17:1~5 ( 111002)
2011/10/8(토)
주일 낮예배 : 영생은?  


본문 : 요한복음 17장 1절~5절
제목 : 영생은?
일시 : 2011년 10월 2일, 주일예배

(어린이 설교과 파송)

어린이 여러분, 함께 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이 뭘까요? 영어로는 Eternal life예요. 영원히 산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예수님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영생은 죽지 않고 사는 거, 끝없이 사는 거, 혹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거...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가 아닌 것이지요. 사실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엄마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친구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은 또 뭘까요? 내 생각만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엄마를 알 수 없어요. 가장 쉬운 길은 엄마가 되어보는 거예요.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그런 거지요. 그러니까 영생은 한분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거라는 말이예요. 그러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어린이 여러분,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좋은, 부족한 것이 없이 살 수 있는 영생, 얻고 싶으세요?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세요. 여러분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예요.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시다구요? 예수님이 계시지요.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것을 잊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거예요. 그런 어린이 여러분들 교회학교로 파송하겠습니다.

(설교)

요즘 읽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올텐데 그날에는 비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밝히 말해줄 것이라고 하셨지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하나님, 그런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을 때가 그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너희를 하나님은 친히 사랑하신다구요.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이제 밝히 말씀해주시니 선생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겠다고 환호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셨지요. 그들은 껍데기만을 보고 있고 진짜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요.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인데 믿는다고 했던 그들이 곧 나를 혼자 버려두고 흩어져버리고 맙니다. 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예수님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아버지와 함께 있는 나, 홀로 있을 수 없는 나, 세상을 이긴 나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으면 나를 혼자 버려두고 각자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과 하나가 되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으면 그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성경책 어느 부분을 펴서 읽어 주시오.” 아내는 남편이 가리키는 곳을 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거의 다 읽었을 때쯤, 남편은 영원한 세계로 넘어갔습니다. 숨을 거둔 남편의 얼굴은 평화로 가득 덮여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위대한 지도자 죤 낙스(John Knox)입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읽어 달라고 부탁한 말씀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후 제자들에게 전할 말씀을 다하시고 기도를 드림으로 만찬의 자리를 끝내셨습니다. 그 마지막 기도가 17장입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로이드 죤스(Lloyd Jones)목사님은 이 17장을 가지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채플 주일 아침예배 때 48번에 걸쳐 설교하였답니다. 그만큼 우리가 곱씹고 묵상해야할 내용이 가득한 본문이란 것입니다. 쉽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한절 한절이 우주의 원리와 믿음의 깊이에 잇닿아 있는 놓칠 수 없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함께 그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생의 목적과 의미를 다짐하며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지요. 우리도 늘 기도하는 시간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우리를 맞추어 보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때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이래야하지 않을까요? 나의 영광도, 나의 실패도, 나의 기쁨도, 나의 슬픔도, 나의 명예도, 나의 수치도 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사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드리는 청원에서 시작하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나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기도로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은 때를 아셨습니다. 심을 때인지 거둘 때인지 말할 때인지 침묵해야할 때인지 싸울 때인지 사과해야할 때인지 화낼 때인지 화를 참고 기다려야할 때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때를 알고 때에 따라 사는 사람이 잘난 사람, 철인입니다. 철을 모르면 철부지지요. 아버지는 때에 따라 나타나십니다. 아주 알맞게 정확하게 나타나시지요. 아니 아버지의 모습은 다름 아닌 때이고 철입니다. 그러니 때를 알고 철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따라 산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아신 때는 세상에 왔다가 돌아갈 때였습니다. 그 때를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받아들이니 그러합니다. 그래서 일생을 그 때를 향해 초점을 모으고 준비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모르면 그 때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돌아갈 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게 이미 굳은 버릇이 되어 치료 불가능한 암 진단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위인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죽을 자리를 향해 뛰어 들었습니다. 그 때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삶과 죽음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명임을 잘 알고 그래서 이의 없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죽음을 주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지요. 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한다면 그런 어리석음 또는 불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를 스스로 밀거나 당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서두르지도 미루지도 않습니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으면 기다릴 일입니다. 이윽고 때가 이르면 감사히 받아들일 따름이지요. 이 땅에 태어나던 그날을 당기지도 밀지도 아니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때, 죽음을 영광이라고 보셨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하시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떻게 죽음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제 곧 십자가 형틀에 달릴텐데 그 고통과 수치가 어떻게 영광된 것일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광인 까닭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 아버지 명에 ‘예!’하고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자신이 사명을 좇아서 살았으니 늙어서 죽든, 아파서 죽든, 사고로 죽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렇게 산 사람에게 죽음이란 부활의 영광에 잇다은 통로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도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영화롭게 되었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렸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광되게 하고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는 말씀은 아들이 제대로 잘 죽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는 말씀이지요. 아들의 바른 죽음은 아버지한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삶의 열매요, 바른 삶은 그를 세상에 보내신 분, 아버지의 영광인 까닭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면 코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멋진 삶을 살면 부모가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예수님은 한결같이 당신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면서도 당신이 하는게 아님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도 아버지시오.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분 또한 아버지시니 맡겨드리는 삶, 믿음인 것입니다.

40년 동안 예수회 수도원에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한 어느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 어떤 몸가짐을 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곁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다지요.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온 모습과 같다.” 사람들이 사는 태도는 갖가지인데, 죽을 때도 생전에 살아온 태도와 같은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굴던 사람은 제멋대로의 태도로 죽어가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공덕을 쌓는 곳이며 현세 그 자체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현실 생활 가운데 실현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성 이레네오는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삶에 이미 부여되어 있고 따라서 삶도 죽음도 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삶도 죽음도 다 하나님의 생명이지요. 그것을 싫어 버리려 한다면 곧 하나님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세의 삶에 집착하면 하나님의 생명의 겉모양에 구애되어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수사가 본 이야기입니다. 2차 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될 때 그곳의 주교였던 로스신부님이 말년에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답니다. 그는 주교에서 은퇴 후에 수도원에서 보통 회원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여러 해 동안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지요. 수도원 안의 화장실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매주 두 번씩 청소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주교님이 반신불수가 되어 토쿄 성모병원에서 요양을 했는데, 놀라운 일이 생긴 겁니다. 말도 할 수 없는 반신불수 환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교님의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동자, 천상의 미소, 천사와 같은 명랑한 마음가짐이 가까이에서 돌보던 간호사, 수녀, 의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나중에 예수회에서 주교님의 병환이 깊어 병원에 폐가 된다고 수도원으로 다시 모셔오려고 했을 때, 병원 수녀들이 주교님을 귀찮게 여기기는 커녕 자기들한테서 주교님을 빼앗아가 가지 않도록 간청을 했답니다. 미신자였던 어는 의사도 주교님에게 감화되어 신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하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도 인간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을 가르칠 수 있었던 분이시지요. 성모병원의 한 병실에서 즐거운듯 간호사들에게 밝은 미소를 보내고 있는 노주교의 모습, 훌륭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영광은 죽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영광으로 볼 수 있는 눈, 마음이 삶의 최고의 기술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둠에서 빛으로, 싸움에서 화해로, 분열에서 하나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본 생각해 봅니다. 죽는다는 것, 죽음이 없는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까요? 죽음이 있어 삶이 있는 거지요. 죽지 않고 이런 세상, 이런 인생이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없어짐이 아닙니다. 죽음은 변화입니다. 에벌레가 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은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접촉점인 것이지요. 이 세상에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냇가의 물이 줄더니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이다. 땅으로 들어가 지하수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으로 변화한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이 죽어 없어지겠습니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집 나가는 날부터 아버지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를 지구에 보내놓고 아버지께서는 한번도 잊지 않으셨고 기다리시고 매 순간 떠나지 않고 함께하셨지요.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음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죽는 날이 바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날이요, 아버지께 최고의 영광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몰라서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때를 알고 때를 기다리며 그 때를 영광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 그래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함께 2절을 읽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다스리는 모든 사람, 모든 육체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영생이 없는 것이지요. 즉 껍데기만이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생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같은 이야기지요. 숨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아들이 없이는 살 수 없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니 불행한 삶입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것은 그의 뜻대로 사는 것, 그와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어 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어떤 뜻으로, 어떤 정신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래서 영생이신 아버지께서 주신 아들의 뜻, 의지로 사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에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육체가 죽지 않는 것도,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3차원적인 인식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 이레네오가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생명임을 아는 것이 영생이지요.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할 때, 동침과 안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관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앎을 아는 사람과 대상이 떨어져서는 아니됩니다. 하나가 될 때 저절로 알게 됩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을 때 그러합니다. 그렇게 아는만큼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안다는 생각으로 알려는 한 그 안다는 생각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와 일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아는 길은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되어보고, 내가 자녀를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아버지를 아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님을 아는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내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리스도 의식 차원까지 올라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산 정상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길은 그 정상에 올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밑에서 나는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식대로 본 것을 안다고 하는 자기 생각이지, 정말 자기가 정상을 본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안다는 것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 깊은 일치를 뜻하지요. 하나로 됨이란 같은 중심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중심이 같을 때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영생하시는 분의 중심이 곧 나의 중심일진대 그러고서도 영생 못할 무슨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은 우주에 중심이 하나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사물이 서로 다르게 보임은 우리 서 있는 자리가 아직 중심에서 먼 탓입니다. 우리가 중심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게 하나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너와 나, 이념과 종교로 편 가르기는 모래성과 같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런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몹시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눅18:18~30)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을 말씀하셨지요. 내 것과 네 것을 따지고 거기에 매여 있으면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짓에 길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린 사람, 다른 말로 다 내어 맡긴 사람, 하나이신 아버지를 알아 그와 일치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니 두려울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영생이고 참된 환희인 것이지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함께 읽은 16장 33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어지는 4절과 5절을 함께 읽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뭉클하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의 고백이 되어야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다 이루고 땅에서 아버지께 돌릴 최고의 영광인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그 부모가 텔레비전에 나와 춤을 춥니다. 자식이 출세를 하면 죽은 애비까지도 영화를 누리고 포도나무 결실이 좋으면 농부가 칭송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다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지요.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날 때 받아 온 일을 완수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누리십니다. 목사가 목사 일을 제대로 하면, 농부가 농사 일을 제대로 하면, 장사꾼이 장사를 제대로 하면 그게 모두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빛나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아무리 밝은 라이트도 햇빛을 더 밝게 할 수 없는 것, 우주의 어둠을 사람이 더 어둡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 빛나게도 어둡게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영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그 영광인 것입니다. 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가 잠시 세상에 와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제 다시 돌아가는 날, 그 영광을 되찾는 것,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땅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에 자신을 돌아보며 또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영생은 아버지를 알고 그의 아들을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의 가장 큰 바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삶의 신비라는 말입니다. 눈을 떠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려는 궁극적인 목적과 계획, 섭리 아래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다 필요해서 있는 일,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왜 세상에 왔는지를 아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이지요.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도 사실은 영생을 주기 위한 사랑이며 섬김임을 고백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완성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내가 누구인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또한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온 것을 아셨듯이 저들 또한 때를 알아 때에 맞게 살게 하옵소서. 몰라서 두려움에 헤매지 않게 하시고 사랑임을 알아 영광을 받고 영광을 돌리는 저들이 되게 하옵소서. 저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저들을 다스리시는 아들을 알게 하시고 그 아들과 하나된 삶으로,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들에게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시고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 안에 들어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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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주일 낮예배 : 내 사랑 안에 요15:9~17 110703     1285
319   주일 낮예배 : 포도나무와 가지 요15:1~10 110626     1084
318   주일 낮예배 : 나보다 크신 분 요14:25~31 11052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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