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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 오동성 목사의 설교입니다.
본문: 요16:25~33 ( 110918)
2011/9/25(일)
주일 낮예배 : 그날에는  


본문 : 요한복음 16장 25절~33절
제목 : 그 날에는
일시 : 2011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근심하나 조금 있으면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조금이 사람이 정하는 상대적인 기준이라면 절대적인 기준, 하나님 안에서는 그 조금은 전혀 차이가 없는 하나입니다. 길고 짧은 것이 없이 영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느끼는 조금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기에 받지 못하였지만 구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하는 것은 그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뜻은 참 내가 되는 것입니다. 물은 더욱 물이 되려 하고, 소나무는 더욱 소나무가 되려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바로 본성으로의 회복, 내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바로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나의 소질과 재능,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 참된 기쁨을 찾아온 한 주간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행복한 삶이지요.

오늘 주신 말씀 25절을 함께 읽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줄 때가 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 분명히 말해줄 때가 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비유는 국어사전에 보면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직접 말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쉽게 알려주신 것이기도 하고, 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만 알아듣도록 의미를 숨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하지요. 자기가 보는만큼만 보는 것이 사람입니다. 시집갈 준비를 하는 처녀의 눈에는 시집가는 사람만 보입니다. 임신한 임산부의 눈에는 세상이 다 임산부들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전에도 똑같았는데 입장이 달라지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이 열리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입니다. 알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대로 말해도 비유가 될 뿐이지요. 여하튼 그 비유가 분명히 밝혀질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는 순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분명히 말해줄 때가 온다고 하셨나요? 아버지에 대해서입니다.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첫째는 26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다 하셨습니다. 앞의 다른 말씀으로 표현하면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으로 구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둘째는 27절에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셋째는 28절에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고,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간다 하셨으니 아버지는 내가 와서 돌아갈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함께 26절과 27절을 읽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주실 때, 그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니지요. 많이 구하지 않았습니까? 이것 주시고 저것 주시고 왜 나만 이러냐고.... 그러나 그것은 내 이름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요. 아무것도 구하지 않음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름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일러주시는대로 구하는 것이지요. 이름이 된다는 것은 그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가 되는 것이지요. 그와 내가 하나가 될 때,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이어지는 17장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나오는데,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7장 21절에서 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이니 무엇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되나요?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그를 친히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는 그입니다. 여기서 나는 오동성이 아니지요. 참 '나'는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지요. 십자가에 이전의 나, 껍데기로 사는 나는 못박아 죽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참 나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믿으면 죽음이 없는 영생 안에 있고 중심을 잡아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이를 믿지 못하여 보지 못하면 껍데기로 흔들리며 사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그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하나인 참 나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빕니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네. 하나님과 함께 긴 해안을 걷고 있는 그런 꿈을, 하늘 저 편에는 내 살아온 인생 행로가 영상되어 흐르고 있었지. 매 장면마다 나는 보았네 모레 위에 두 발자국을.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그 분의 것, 내 인생의 최후의 장면이 나타났을 때 나는 돌아 보았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을, 아!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은 하나 뿐이니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때에 그것도 여러번 나는 하나님께 말씀 드렸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와 함께 동행해 주신다고 하였는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때에 그것도 여러번 모래 위에 발자국은 하나뿐이니 저는 모르겠나이다. 모래 위의 발자국은 하나 뿐이니 어찌된 일인지요? 하나님은 말씀하셨네. "내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여. 시련의 때에 나는 결코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하나 뿐 일 때 나는 너를 안고 갔노라."

그러니 삶은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찾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많은 젊은 시절에 참 많이 답답했었습니다. 그 때 어느 선배가 저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나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지요. 어느 책 제목도 ‘돌아보니 발걸음마다 은총’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돌아보아 알아차리는 시간의 간격이 짧아지는 것이 믿음의 성숙의 잣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내 판단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감사와 사랑으로 만난다면 그것이 구원이며 지복인 것이지요. 지나서야 그랬구나 이해가 되지 그 전에는 아무리 알려주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 안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인내하십시오. 질문 자체를 사랑해 보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대답을 찾지 마십시오. 대답이 지금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대답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지금 당신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다 보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그렇게 찾았던 대답이 어느날 당신 안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것, 그러다 어느날 내 안에서 대답이 발견될 것이라는 믿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릴케)

지금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록스타님이 전화를 주셔서 왜 자기 주변에는 힘든 일만 겪는 사람들뿐이냐고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이 풀리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고 마음이 혼란스럽습니까? 미래가 불안한가요? 그런 순간에는 세상이 다 저주스럽지만 그것이 또 다른 선물과 기회가 되는 것은 지나서야 알 수 있지요. 고난과 아픔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어떤 것도 우연은 없다는 것이 영성 세계의 제1법칙이라 말씀드렸지요. 그러니 인내하고 기다리며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할 신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날에는 분명히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 날에는 거울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친히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런 날, 이런 의식 수준, 이런 차원에서는 더 이상 비유로 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가 되시는 것이지요. 다 함께 따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이것을 알게 될 때가 그 날입니다.

이어지는 28절을 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한테서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한테로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어디 예수님만 그러하겠습니까? 사실은 세상 만물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또 지금도 그러한 것이 참 나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니 죄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7장 24절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해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동안은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이제 아버지가 이러한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들을 수 있으면 사실이고 그렇지 못하면 이 또한 비유가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당시에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흥분해서 29절에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밝히어 말씀하여 주시고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이제야 우리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누가 선생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히 알려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믿습니까?
정말 믿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보세요. 31절에 “이제는 믿느냐?”고 반문하시지요. 믿는다고 큰소리를 치던 그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가버릴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그 나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아니었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어찌 그분의 생애만 그러하겠습니까? 그를 믿는 우리가 그러합니다. 믿음은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니 그러합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믿음이지요.
성 어거스틴은 “책 속에 계신 당신께 돌아가 안기기까지 제 영혼은 쉼을 몰랐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함을 알 때에 우리는 참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이런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 나를 모르는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속고 있엇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은 그 날이 아닌 것이지요. 이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믿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믿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정말 힘든 사람은 힘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들 도망가 버립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억울할 것입니다. 외로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들 나를 떠나고 난 혼자이고 나한테만 힘든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셨나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이가 나입니다. 혼자가 아닌 것이 나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를 만나고 그 나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증거입니다. 그렇게 홀로 있을 수 없는 나를 아는 것이 그 날의 징조입니다. 비유가 끝나는 날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다함께 33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미 이긴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이 나를 떠나가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서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할 것이 사실입니다. 왜?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내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내 안에 있으면 환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아니 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고 만나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이를 세상이 어찔할 수 없는 하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그 나로 살면 됩니다. “환난아 와라 내가 만나주마!”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저는 산을 오르면서 만났던 경험을 가끔 말씀드립니다. 2박3일, 3박4일 산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 힘듦의 극에 달하면 힘이 들지 않습니다. 힘듦이 기도가 되어집니다. 그것을 알게 되니 더 힘들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사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사가 다 OK가 됩니다. 달리기를 하는 이들도 같은 경험을 나누곤 합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는 것이 힘들어지다가 어느 순간에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것이 내가 되는 경험을 하지요. 명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달리는 것이 아주 쉬워집니다. 그런 나의 한계를 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내 안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아니 세상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서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지요. 헤롯과 싸우거나 빌라도와 타투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는 그런 것들을 초월하시고 자기 길만 가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소질과 재능을 발휘해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고 쉬워하는 일을 함으로써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과 싸우지 말아야지요.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보다 큰 힘은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이미 이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최고의 기술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오는 것이고,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분명히 말할 그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때가 되면 비유를 통하지 않고도 우리가 아버지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내가 사랑으로 살고 예수님처럼 나도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떠나서 세상에 왔고, 또 세상을 두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얻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평화요, 용기요, 승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소중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 평화를 얻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말 중요한 때에 다 떠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다 떠나도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니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런 나를 보니 그것이면 족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참 좋은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살 때 겪는 시련은 예수님도 이미 당하셨고, 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나의 시련을 당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혼자 있지 않고 이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일러주신대로 아버지께 구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믿어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신 것처럼 저들도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옵소서. 외로고 힘겨운 순간에 아버지께서 함께하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환난을 당할 때 용기를 내어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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