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동 성(신학 목회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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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 연구원에 함께한지 일 년이 지난 이제쯤은 제 안에 가두어 놓았던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두레 안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보답이며, 이 가운데서 앞으로 삶의 同志를 다시 만들어가기 위한 저의 도리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터 놓고 이야기하자면 제가 신학을 하게된 이유는 '절망'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저에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신학의 장에 묻어 들게 하였습니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제가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다시 '말'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저한 '물러섬'과 '되돌아봄'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제 삶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분명히 보이는 이상과 가치가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에서 시작한 결단이었고, 제 신앙의 인식과 실천을 무한하게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하여 한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순간 저의 삶에서 '자기 의'를 세우는 족쇄가 됨을 발견했습니다. 가졌던 理想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할 '내'가 잘못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나는 무엇을 했으며, 정말 나를 살리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혼돈 되는 공허함이 맴돌게 되었습니다. 몰트만이 이야기했던 기독인이 가지기 쉬운 '관계성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를 함께 경험해 버린 것이지요. 지나온 삶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는 알게 모르게 제가 빠져 버린 함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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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절망감으로 신대원 생활을 시작해서 한 학기를 보내고,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사람들' 덕분에 절망이 소망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가면서 어느새 두 번째 학기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두레 공동체와 거기서 만난 사람들도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해를 맞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모태 신앙으로 자라 오면서 교회 안에서 오직 목사가 될 서원과 꿈만을 꾸면서 커 왔습니다. 하지만, 어두웠던 우리의 80년대 중.후반을 대학에서 보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를 고민하는 저를 살게 했던 것은 그 꿈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의미'였습니다. 참 암울한 세월 속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하나님'과 '역사'를 함께 붙들고, 오늘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역사는 나누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그 때 교회는 말 그대로 침묵했었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이야기하기란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참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 참 평화와 자유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역사' 가운데서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80년 오월 광주는 저에게 참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독성(영성)과 사회성(운동)을 함께 붙잡으며, '예수'가 아닌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다시 한 번 세상은 바뀌었고, 저는 무척 혼란스러움과 곤핍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화의 핵심은 '동구권의 몰락'과 '포스트 모던'이라는 일련의 흐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실한 삶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할 場은 사회와 역사라고 생각했고, 그 실천을 위해서 사회과학을 공부했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사회과학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신에 자리잡은 것은 문화의 소용돌이와 더 이상 총체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는 다원성과 해체적인 사회상이었습니다. '계급'의 담론 대신에 문화와 '성(sex)'의 담론이 무성해졌고 주위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도 하나, 둘 삶의 장을 바꾸나 지쳐서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들 큰 상처를 받고 절망하거나, 심각한 회의(懷疑)와 피해 의식 속에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마냥 그 조류를 따를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제가 들었던 주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운동과 역사에 대한 고민은 신앙의 결단을 그 출발로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그 기쁨과 헌신으로 시작했던 걸음이었기에 더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삶을 던졌고, 치열함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감사해야 할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들, 그리고 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감의 상실이었습니다. 거기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념을 여지없이 박살낸 것은 '失戀'의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했던 절 철저하게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결국 지금까지 살아왔고 선택해 온 삶의 방식 때문에 소중한 戀人까지 잃게 되니 전 정말로 설자리를 잃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삶의 가치와 목표로 굳게 잡았고, 또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을 모이게 했던 그 '삶'의 상실은 '절망'이라고 이름지어도 좋을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살 자신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도 했고, 차라리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삶이 망가져 버리는 것이 좋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배웠던 것이 '남을 위한 삶'이었고, 他者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기 보다 '자기 자신에게서 먼저 비판할 것'으로 삶이 정향(orientation)되어 왔기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게 극심한 내적 고갈과 지쳐버린 영과 육을 가지고, 집을 떠나 나그네 길을 가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쉬고 싶은 그런 심정을 가지고 저는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산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결국은 '나의 의'를 세우고 있었던 '나'의 모습에 대한 철저한 '돌아봄'과 '물러섬'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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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그 토양 가운데 선지 동산에서 '신학함'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저에게는 무슨 생각과 고민이나 비판의 여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살기조차 벅찬 그런 상태였으니까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웠고, 그래서 신대원 3년은 침묵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티없이 맑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두레에서의 처음 한 학기도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점차 은혜와 시간을 통해서 영과 육이 회복되어 가고, 주위의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꿈을 꾸어갈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학을 하며, 목회를 준비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서 상실했던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기독성'과 '사회성'에 대한 물음, 즉 하나님과 역사를 다시 묻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다시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학과 목회의 준비는 이런 것이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너무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이란 이름과 쉬고 싶다는 변명 아래서 하나님께서 그간의 삶과 고민을 통해서 귀하게 가르쳐 주었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터무니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와 사회는 어찌되든지, 내 안에만 갇혀서 한탄만 하며 살아가는 저의 모습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매 순간 깨어서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함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 혼자 절망하고 좌절하고 무기력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츰 제가 예수님을 만나던 때의 기쁨, 그리고 다시 역사와 사회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던 감격이 저의 삶을 새롭게 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저의 교만과 집착을 무너뜨리시고,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서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삶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건지시려는 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마 그 즈음 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하는 가운데 많은 깨우침과 치유되는 변화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기도하게 하시고, 저는 기도를 하게 되니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변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었고, 회피하고만 싶었던 현실과 내가 살아가는 땅과 역사의 문제가 새삼 하나님 앞에서 저의 문제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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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중반 대학 초년생이었던 저에게 광주는 이제까지의 삶을 철저히 부정하고 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땅의 현실과 모순에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올바르게 시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고민을 시작하게 해 주었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검찰의 5.18불기소 처분이 내려진 작년 7월 당시의 제 모습은 심한 불감증 그 자체였습니다. 그 무엇에 잘.잘못을 따지거나 불의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안타까운 울분을 담아 낼 여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깨어서 시대를 염려하고, 정의로운 역사를 세우고자 분투하는 이들의 열망들에 냉소만을 보냈었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그 자체와 책을 읽고 토론하고 그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껍데기에 부끄럽게도 만족하고 안주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삶 자체의 소중한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저에게 있어서는 선.후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의 연속들 속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예장 목회자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사회 속에서 조그맣게 역사의 정의를 이야기하던 물줄기가 거대한 강물을 만들어 가는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내가 속한 삶의 場에는 아무런 변화와 모색의 기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계에서는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회개하며 실천하고 있는데, 마땅히 신학하는 자리에 서서 그 새롭게 거듭남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신학교는 잠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사회와 역사와 상관없이 어찌되어 가든지 강의에 참석하기에 급급했고, 리포트 써내기에 바빴습니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대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교회를 이끌어 나갈 미래의 지도자(섬김이)가 될 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서, 시대와 역사의 징조에 민감하고 머리에 재를 쓰고 옷일 찢어야 할 신학도들이 너무나 담담했습니다.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흡사 사회와 역사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듯한 일상만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시대를 탓하고,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이 안일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5.18문제만이 아니기에 문제는 더 심각했습니다. 5.18문제만이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야 할 소중한 역사의 장이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신학하는 태도와 신학도의 임무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기우이겠지만 이래서는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교회의 갱신과 하나님나라는 망상일 뿐이었습니다. 역사와 사회 속에 아무런 역할도 수행할 수 없이 머리 속에만 평화와 기쁨을 노래하는 기독교는 성서와 예수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우리가 주인이 되었을 때 또 재탕할 뿐입니다. 두려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여하튼 저의 신학하는 태도와 자세는 광주로 하여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 생활의 전부를 광주가 바꾸어 놓았듯이, 다시 한 번 광주가 저의 신학 수업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주의 비극을 이 땅에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 통한과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듣고 계셨을 텐데, 왜 불의가 정의가 압살 당하고 거짓과 살인이 정직과 공의를 짓밟게 내버려 두셨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학살자들의 머리에 축복 기도를 하게 내버려 두셨을까? 그것은 오늘 저와 같은 어리석은 죄인을 깨우쳐 당신의 뜻을 가르치고자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나태해 있고, 삶의 모든 것이 무너져 있던 저의 모습은 누구를 탓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나로부터 철저한 회개와 기도의 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0월에 장신대에서 신대원 1학년들을 중심으로 '범장신인 회개 주간'이 선포되고, 교회와 민족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면서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로 광주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소망하는 기도 모임들을 만들면서 침묵 시위도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와 신학을 준비하는 선지 동산에서 다시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을 만나고, 그 고민을 가지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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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모든 죄악된 현실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는 섭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신학하는 1년간의 작은 경험에서 얻은 것은 역사는 그 뒤틀림 가운데서 마땅히 시대의 작은 예수로 십자가를 져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호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 호소를 듣는 신학을 하고,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부름에 응답해서 기쁘게 시대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의 복음의 진리를 모든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진실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것이 교회와 신학이라는 커다란 집을 세우는데 소중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복음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들어오셨다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역사를 운용해 나가시며, 그 가운데서 새로운 창조를 수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내용을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의 양태가 그러해야 하듯이 선지 동산에서 신학하는 이들의 가슴에도 그러한 역사의식이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하며 깨닫게 됩니다. 아직은 꿈을 다시 꿀만한 '자신'이 없고 신학하는 나의 모습도 부끄러움이 가득할 뿐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성실하게 나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참 인간이 되고, 그것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신학하는 소명의 자리에 올곧게 서고 싶은 것이 소박한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