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찬비(139) (heesuckko@yahoo.co.kr) ▽ 구분: 영화 ▽ 2002/12/22(일) ▽ 조회: 4022

아이들의 통쾌한 반란-영화 [마틸다]  영화 '마틸다'는 그다지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방송에서 틀어주는 가족 영화쯤으로 보아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가 바로 '마틸다'이다. 주인공 마틸다는 아주 귀여운 어린 소녀다. 그러나 그녀는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네 살 때부터 책을 읽고 싶어 먼길을 걸어 혼자 도서관을 찾는다. 다섯살 때 이미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읽을 정도에 이른다. 그러던 그녀에게 조금씩 이상한 능력이 생긴다. 염력이 생긴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물건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게 된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마틸다는 처음에는 부모들을 골리는 장난에 초능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마틸다는 초능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을 괴롭히는 교장 선생님을 혼내주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하니 선생님을 돕는다. 결국 자신을 짐으로만 여기던 가족들은 마틸다를 두고 스페인으로 도망가고 마틸다는 하니 선생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어른인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느끼게 되는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영화속 어른들은 거의 모두 악인으로 등장한다. 마틸다를 이해해 주는 어른이라고는 담임인 '하니' 선생님과 네살 때 찾은 공공 도서관의 사서 정도가 고작이다. 부모들은 한술 더떠 가히 엽기적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악당들이다. 마틸다의 아버지는 훔친 차에 접착제로 범퍼를 붙이고 기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톱밥을 썪는 엉터리 사기꾼 중고차 판매상이다. 어머니는 딸아이의 학교 생활에 관심이 없다. 그녀에겐 시시콜콜한 남의 불륜 이야기로 수다를 떠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마틸다가 입학한 학교의 교장 선생 트런치불은 어른의 모든 악한 모습이란 모습은 모두 모아놓은 듯하다. 전직 투포환 선수인 그녀는 초콜릿을 먹은 아이를 하루종일 독방에 가두어 버리고 땋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이를 투포환 던지듯 휘휘 돌려 담장밖까지 집어던져 버린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화일 수도 있다. 어른들은 모두 나쁘다는 관념을 아이들에게 심어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영화 '마틸다'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보아야 할 영화이다. 영화속 어른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란 절대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과 같은 것일 수도 있기에... 마틸다의 부모는 현실에 존재하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책을 쓰레기라 부르고 하루종일 TV 앞에 붙어산다. 남을 속이지 않고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천재 마틸다를 위해 집을 찾아온 담임 선생에게 TV 보는 것을 방해했다고 고소하겠다고 소리친다. 왜 작가는 부모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을까? 마틸다의 부모는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들은 TV를 바보상자라 부르고 그보다는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많은 교육을 시키고 싶기에 몇군데씩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킨다. 남을 속이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늘 강조한다. 마틸다의 부모처럼 엉터리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고 자신의 틀에 아이들을 맞추려 하는 점에 있어서는 결코 마틸다의 부모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는 너무도 쉽게 마틸다의 부모나 교장 선생처럼 폭력에 의존한다. 마틸다의 초능력은 이러한 어른들의 폭력에 맞서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상상의 산물인 셈이다. 마틸다가 초능력으로 교장 선생을 혼낼 때 아이들은 환호한다. 어른들에게 맞설 힘이 없는 아이들에게 마틸다의 초능력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대리만족을 주는 만화속 영웅과도 같은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어린 천재 소녀의 복수라는 설정은 어쩌면 폭력에는 폭력이라는 식의 어른들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섯살짜리 소녀가 찰스 디킨즈를 읽는 모습은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마틸다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 어른들이 만들어 낸 상이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대적이기만 한 어른들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갖지 못한 아이들의 서글픈 현실이 있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워져서 어른들이 자신들을 혼내듯 어른들을 혼내주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순진한 소망이 있다. 현실에서는 그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 자신을 맡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아이들은 초능력을 빌어서라도 맞서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로알드 달의 동명 동화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이 어른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지 일깨워 주고 싶을 것이다. 언젠가 길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를 혼내다가 아이를 안기 위해 무릎을 꿇고 바라본 거리가 그렇게 혼란스럽고 무서운 것임을 처음 알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아이들에게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같이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문득 몇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1.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의 HP는? 2. 메신저에 뜬 '수거푸러'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3. 내 아이가 가장 존경하는 만화 주인공은? 이 세가지 질문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이들과의 긴 대화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른들은 스타크래프트의 폭력성을 걱정한다. 물론 피흘리는 장면, 터지고 죽는 장면들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게임은 게임으로 즐길 줄 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게임은 게임으로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스타크래프트를 통해 수학과 직관을 배운다. 스타크래프트 류의 많은 게임들은 철저하게 수학적이다. 프로게이머들은 한부대의 질럿에 맞서기 위해 몇명의 마린과 메딕이 있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안다. 그러나 그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방정식으로 푸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 직관으로 알아내는 것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이끌어갈 세계는 이렇게 수학도 감성으로 대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수거푸러'란 말은 메신저상의 '수신 거부를 풀'어서 내 메시지를 받으라는 말이다. 한글학자들이 한탄할만한 언어 습관이다. 그러나 언어마저도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고 공유한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언어습관만을 강요한다면... 어쩌면 그 아이는 '왕따'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때 수십권이나 되는 위인전을 몇번씩이나 읽었다. 거기에서 나는 노력을 배웠고 희생과 봉사를 배웠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위인전을 접한 것 같아 후회스럽다. 글로 만나는 위인들의 모습은 인간적이라기보다는 항상 모범적이었다. 늘 최선을 다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정확한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같은 예술가들의 전기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들의 감성과 예술성을 느끼기보다는 솔직히 그들의 성실함과 작품 수에 감명을 받았다. 영화 '마틸다'는 오늘 내가 어떤 부모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아이를 위한다는 내 믿음으로 아이앞에 펼쳐진 다양한 길들을 막고 내가 만든 한가지 길로만 가라고 아이를 다그치지 않는지 살펴보게 한다. 문득 피천득님이 떠오른다. 남들이 돈벌고 일하고 술마시느라 쓴 시간들을 님은 딸 서영이와 함께 했다고 한다.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인상을 써 보인 아빠를 멀뚱히 쳐다보다 밖으로 나가버린 서영이 때문에 하루종일 괜한 짓을 했노라 후회하다가 저녁에 들어온 서영이와 밤늦도록 공기놀이를 했다는 님의 그 사랑을 닮고 싶은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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