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5
◎ 이름: 깊은산 (eastsain@chollian.net)
◎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08/10/7(화)
◎ 조회: 1477
창세기(3) : 낯선 처음  


1-2. 낯선 처음

이러한 창세기 1장 1절은 신비한 네 단어, 낯선 언어로 이루어 있습니다. <태초>와 <하나님>, <천지>와 <창조>가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이 구절을 구성하는 네 단어, 태초와 하나님과 천지와 창조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의 무지함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사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속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라고 했는데, 태초가 무엇일가요? 도대체 ‘태초’가 언제인가요? 몇 천년 전, 몇 만년 전인가요? 아니면, 몇 억년전?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이성이 성숙한다고 해도 이 때가 언제인지 밝힐 도리는 없습니다. 성경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나 논리의 언어이기보다는 종교와 상징의 언어로 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연대기적인 시간(크로노스)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데, 종교적인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은 더욱 신비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이 전부인줄 아는 눈으로는 ‘태초’를 알 수 없습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 안에(히11:1) 있을 때에야 비로소 참 태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초는 처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초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낯설음’입니다. 낯설다는 것은 두려움이고 어색함입니다. 그런데, 이 낯설음을 넘어서야 구원, 자유와 해방과 감사가 있지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 비결은 그 두려움에 맞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똑바로 볼 때 비로소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도 내가 하는 ‘생각’인데, 그 생각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니 낯설음과 잘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그런 낯설음이 있습니다. ‘태초’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넘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낯설음은 우리에게 처음, 시작입니다. 그것이 없어 어찌 삶이 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들이 그랬고, 독립군들이 그랬습니다. 낯설음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무엇인가를 이루어가는 시작이 태초입니다. 시작은, 때 시(時)에 만들 작(作)이라고도 합니다. 때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때를 선택할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요2:4,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대화)
그렇게 창세기 1장 1절은 오늘 우리는 낯설음으로 가게 하는 물음의 시작입니다. 태초가 어디인지, 우리는 그 태초로 가야 합니다. 두려움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다면 안주입니다.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를 산채로 도시로 운반할 때 수조에 ‘꽃게’와 같이 운반한다고 합니다. 꽃게의 집게가 오징어를 건드릴 때 오징어는 죽지 않고 살아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징어는 도시로 오기도 전에 죽어버리게 된다고 하지요.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포도송이가 썩지 않고 발효가 되어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압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상황과 처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움직이시고, 그것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 오늘 나의 낯설음이 무엇인지, 나의 가정, 나의 일에서 낯설음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학교 가는 것, 이사 가는 것, 공부를 시작하는 것, 외국에 나가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 결혼하는 것이 다 낯설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는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나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렇게 ‘예!'로 응답하는 것,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태초, 지금을 만나는 비결입니다.

그런 태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 홀로 있다면 태초는 두려움이 되고, 그 태초를 벗어나서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시간과 공간과 생각의 제약 속에 있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꼴과 같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손으로 만지면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를 더듬는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처럼 생겼다고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천장이라고, 등을 쓰다듬는 사람은 벽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자신의 제한된 경험 속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말하기 전에 우리가 앞서 알아야할 것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비이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신 것 가운데 하나가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계명에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하나님’을 지칭할 수 없어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지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생각일 뿐입니다.
성토마스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음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를 가지고 평생을 싸우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교단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면 어떻고 하느님이면 어떻습니까? 영어로는 God이고, 한자로는 天主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름 지어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을까요? 내 생각에 하나님이 있으면 없는 하나님이 생기는 것일까요? 내 생각의 차원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그 틈을 비집어 만날 수 있는, 그 틈을 확장시켜 가는 것이 깨달음이고 지금 여기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과 함께 이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 처음 시작에,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낯설음에, 두려움에 그 하나님이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잃고 살아가니 인생이 고달픕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삽니다. 나(Self)를 모르고 내(ego)가 살아가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그렇게 되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키를 한자도 더 할 수가 없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시편23편) 목자는 가장 선한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힘이 되십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런 믿음으로 살아갈 때, 나는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그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나의 낯설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태초에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면 볼수록 신비합니다. 우리에게 하늘은 무엇이고 땅은 어디인가요? 창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시작에서 나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나는 그 하나님을 따라서 지금 나의 낯설음에서 나의 하늘과 땅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그 첫 시작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시작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신비, 신의 비밀입니다. 이 말씀을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되어집니다. 어떤 이의 인생은 지극히 우연하게 태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또 어떤 이의 인생은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섭리가 있음을 분명히 알며, 그 뜻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인 성경에 창세기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시작이 바로 이것,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고,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임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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