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2019/12/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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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남미 30일) 추키카마타 : 게바라를 만나다.  


● 20190529(#남미 30일) 산티아고(Santiago) - 칼라마(Calama) - 추키카마타(Chuquicamata) -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San Pedro de Atacama), 추키카마타 광산 : 23살의 체 게바라를 만나다.  

산티아고 공항에는 나와 같은 노숙자로 가득해 밤이 더 활기찹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노숙은 그야말로 깜깜한 시골에서 홀로의 노숙이었는데요. 물론 공항 노숙도 처음은 아닙니다. 새벽 비행기에 숙소 비용을 아낀다고 여러 번 노숙을 자청했었지요. 그런데 모두 기억이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이러구 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요. 게다가 이번에는 칼라마라는 여행자들에게 악명이 높은 곳으로 이동을 하기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입니다. 어떻게 되겠지요. 산티아고에서도 아무 것도 몰랐던 낯선 도시를 둘러 둘러 이렇게 공항까지 왔으니요. 신비입니다.

사실 이제부터가 내가 생각하던 진짜 남미 여행입니다. 그간 다녀 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중부는 남미 가운데 유럽 여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페루의 마추픽추와 티티카카 호수, 이카의 와카치나 사막, 와라즈의 69호수,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보는 여행을 꿈꾸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여행의 딱 중반, 형색은 말이 아닌 몰골이지만 진짜 여행자가 된 느낌입니다.

그간 아끼고 아낀 일정을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 3일,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에 3일, 티티카카 호수에 4일, 쿠스코 마추픽추에 6일을 투자했으니 이제 시작입니다. 산티아고에서 준비한 고산병 약도 공항에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타카마 사막부터는 고산지대가 시작되니요. 티벳에 갔을 때 고산증으로 혼이 난 기억이 악몽같이 떠오릅니다. 부실한 컨디션으로 잘 이겨낼지 걱정이지요. 다행히 부에노스 아이레스부터 따라온 감기는 어느 정도 멈추어 감기약을 먹지 않은지 며칠입니다. 오늘은 칼라마에 일찍 도착해 추키카마타(Chuquicamata) 구리 광산을 방문하고 아타카마 사막이 있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까지 갈 예정이랍니다.

칼라마는 또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꼭 서부영화에 나오는 마을 분위기네요. 아침에 공항에 도착할 때는 한겨울처럼 많이 추웠는데 해가 뜨니 사정없이 덥습니다. 지나가는 차들만 아니면 유령 마을 같아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여행자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광산 마을 그 자체입니다. 이곳에 있는 추키카마타는 세계 최대의 구리 광산으로 칠레 경제의 주동력이기도 하며 23살의 체 게바라가 오토바이로 남미 종주 여행을 할 때 남미의 현실을 결정적으로 마주했던 곳이지요. 외세의 수탈에 맞서서 남미는 하나이고 민중이 주인이라고 역설하던 젊은 그가 이곳 구리 광산의 노동자들의 생활상 앞에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당시 체 게바라는 친구와 함께 무전취식, 구걸하다시피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간직하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서 기념품을 사라고 받은 큰돈을 여기서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그곳 광산 노동자 부부에게 선뜻 건네줍니다. 그렇게 그의 남미 혁명의 꿈이 시작되지요. 의사이면서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또 그런 삶을 살다가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미국 CIA의 사주를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총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지요. 엄혹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삶 마지막까지 민중과 함께했던 그를 누군가는 20세기에 예수를 가장 닮은 사나이였다고 했답니다. 23살의 체 게바라가 갔던 그곳에 51살의 내가 가네요.

칼라마 공항에서 바로 아타카마 사막으로 가는 교통편은 12000페소, 칼라마까지는 5000페소입니다. 그런데 칼라마에서 아타카마 가는 버스는 3000페소네요. 그러니 시간이 더 들고 귀찮기는 해도 칼라마 시내로 와서 버스를 타면 4000페소를 아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나는 추키카마타 광산을 다녀올 계획이라 칼라마로 왔지만요. 칼라마 버스 터미널로 와서 저녁 8시에 버스표를 미리 예매하고 짐을 터미널에 맡겨두고 광산투어 오피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정보의 비지터 센터가 문을 닫았습니다. 대략 난감입니다. 그래서 다시 구글을 검색해 보니 버스 터미널 반대쪽에 투어 오피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분을 걸어왔는데 다시 20분을 걸어가 또 20분을 걸어야 하네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걸어가 보니 바로 광산 투어를 하는 코데코(Codeco) 회사 오피스입니다. 제대로 찾아 온거죠. 예약을 하지 않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비수기라 광산 투어 자리가 있습니다.

10시가 조금 넘어 투어 신청을 했는데 1시에 투어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곳 가이드는 칼라마에는 가볼만한 곳이 없다고 그냥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래도 가만있을 수 없지요. 한 바퀴 둘러보고 와서 투어를 하고 쉬었다가 산 페드로 데 아카타마로 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정말 몇 미터 못가서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한겨울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그늘도 없고 모래만 날리고요... 광산 투어를 하며 확인하게 되지만 칼라마가 추키카마타 광산 직원들이 사는 동네가 맞습니다. 광부들과 그의 가족들이 사는 타운인거지요.

11년 전까지만 해도 추키카마타는 십여만 명이 사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텅 빈 유령 마을이 되어 있습니다. 광산만 남았지요. 또 세계 최대의 구리광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금도 365일 광산에 12000명이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 중 8000명이 지하에서 일하는 광부들이구요. 추키카마타 마을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학교, 병원, 교회, 극장, 경기장, 기차역, 경찰서, 소방서, 은행, 마켓... 마을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답니다. 단지 대학교만 없어서 대학을 가려고 추키카마타를 나가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 가이드 말로는 캠프였다지요. 그러면서 마을 자체가 직원 가족들이 사는 기숙사니 회사 소유고 외부인이라면 학교 교사나 은행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추키카마타의 사람들이 칼라마로 옮겨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광산에서 나오는 먼지 등 유독한 환경에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땅을 파기만 하면 구리가 나오는 노출 광산이라 현재 깊이가 1km가 넘고 좌우 반경이 3km이상이 되는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파낸 바위들은 구리를 채취하고는 또 다른 산이 되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키카마타 마을이 점점 좁아지고 지금은 집들이 바위 덩이에 깔려가는 상황이더군요. 그러면서도 사람도 살지 않는 마을을 그냥 두는 이유는 이것이 칠레의 역사라는 자부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이드니 그렇게 말했겠지만 노동조합이나 광부들은 그들이 살던 암담한 현실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게바라는 1950년대 그곳 현실을 보면서 진폐증으로 죽어나가는 광부들, 제대로 된 작업 환경 없이 죽음에 내몰리며 목숨 값으로 돈을 벌면서도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지 못하는 노동 현실을 목도하고 분노합니다.

그래도 다행으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그곳을 벗어나 칼라마로 이주해 살 수 있게 되었네요. 2008년에 마지막 가족들이 이주했으니 11년이 되었습니다. 게바라가 다녀가고도 광부들과 그의 가족들은 60년을 더 그곳에서 살아오며 또 다른 게바라가 그곳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삶을 살고 증언해 왔기 때문이겠지요. 추키카마타 광산으로 인해 칠레는 부유해졌지만 광부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누추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 편하게 버스를 타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현실이 만들어낸 거대한 작품, 노동의 결과들을 관광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네루다가 노래했듯 광부들이 돌을 찍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마주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또 하루의 한 자락을 접으며  60여년 전 그곳에 있었던 젊은 체 게바라를 추모합니다.  

<<체 게바라>>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해방가가 아니다. '해방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네가 나를 죽이려고 왔다는 걸 알아. 쏴, 겁쟁이야! 너는 그저 한 사람을 죽일 뿐이야.

나는 쿠바인, 아르헨티아인, 볼리비아인, 페루인, 에콰도르인 등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한 이 투쟁에는 전방이 따로 없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그 어떤 나라의 승리도 우리의 승리인 것처럼, 패배도 우리 모두의 패배이다.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할 때마다 우리의 함성을 들어주는 귀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팔을 들어주려고 뻗치는 또다른 손이 있다면 죽음을 환영하라.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 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율에 관한 한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이 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모험가라고 부르겠지만, 저는 다른 류의 모험가입니다. 자기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가입니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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