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2019/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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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남미 18일) W트레킹 3일 : 세상 한 가운데  


● 20190517(#남미 18일)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 3일, 프란세스(Frances) 산장 – 룩아웃 프렌치 그라시에르(Lookout French Glacier) - 룩아웃 브리타니코(Lookout Britanico) -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 산장(22km) : 또 다른 세상 한 가운데

아침에 잘 자고 일어나니 비가 옵니다. 전문적인 가이드가 다르긴 합니다. 손님들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만들고 저녁식사 후에도 정리도 못하고 손님들 지루하지 않게 매일 매일 이야기 거리를 내놓고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 나로서는 불편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같은 가이드를 하는 동병상련의 성의를 생각해 자리를 지켜주지요. 나는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홀로 있는 시간이 좋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의 유머와 살아가는 이야기, 다른 세계와 삶의 자리가 다른 이들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한결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과 걷고 있습니다. 칠레 커플, 오스트레일리아 커플,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흥이 많은 아르헨티나 여자분, 그리고 나입니다.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까지 싸는 일을 며칠 같이 했다고 이제 손발이 척척 맞게 잘합니다. 길을 나서니 다행히 비가 멎고 하늘이 개이기 시작하네요. 이탈리아노 캠핑장까지 30분여 걸어가서 짐을 내려놓고 간단한 차림으로 프렌치 빙하 전망대로 향합니다. 호숫가로 오던 길에 만난 뿔산과 파이네 그란데 산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코스지요. 웅장한 프렌치 빙하를 마주하면서 할 말을 잃습니다. 신혼여행이라는 칠레 커플과 아르헨티나 여자분은 체력의 한계로 여기서 멈추고 내려가고 나머지는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 6km여를 더 걸어 들어갑니다. 비구름이 몰려올 듯한 하늘이 심상치 않지만 정말 아름답습니다. 처음인데 너무나 익숙한 산길을 걷는 느낌이 무엇이지 찾아보니 십수년 만에 지리산을 종주하는 그 느낌과 딱 마주치네요. 아! 합니다. 내가 이 길에 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파이네 그란데를 비롯한 거대한 산들과 빙하에 둘러싸인 골짜기 전망대, 브리타니코 룩아웃에 서니 세상이 눈 안에 들어온 듯합니다. 빙하가 눈사태로 무너지는 굉음과 눈사태가 일으키는 눈 안개도 목도합니다. 아직은 봉우리들이 구름에 가려지지 않아 감사하지요. 곧 구름과 바람이 몰려오며 빗방울이 들어 서둘러 돌아오는 길을 잡습니다.

이탈리아노 산장에 짐을 다시 정리해 짊어지고 새로운 길로 호숫가를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파이네 그란데 산장을 향합니다. 어제 내내 걸으며 만났던 그 분위기의 길이네요. 참 편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20여Km의 산길을 걷고 나니 발이 부르트고 몇 번을 미끄러져 교통사고로 넘어진 곳을 또 다치고 무릎과 엉치에 멍이 들고나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제로 베이스로 갑니다. 사뿐히 걷기, 다정하게 바라보기, 주의깊게 듣기, 공손하게 어루만지기... 다시 길 가의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가 사랑스럽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온 길인데 헉헉대며 짜증으로 만날까요. 아니지요. 어느 순간 내가 칠레에 있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칠레를 걷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내 나라를 걷는 느낌, 지리산의 품에 안긴 느낌, 내 본향에 와 있는 듯한 깨달음이지요. 어디나 나의 땅이고 어디나 본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그 길에서 다시 나를 만납니다.

그렇게 걸어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들어와 4박5일만에 샤워를 하고 이빨을 닦습니다. 헤드 랜턴에 의지하지 않는 일상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오히려 낯설고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누가 토레스 델 파이네를 ‘토레스 델 바람’이라고 했는데 산장 밖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텐트란 불가능하지요. 오는 길에 바람에 밀려 날라 갈 듯한 길을 지나면서 새 배낭 레인 커버가 날라가 버린 것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없으면 없는대로 또 길을 가면 됩니다. 브리타니코 룩아웃에서 바라보던 세상, 그 한가운데 지금 서 있습니다. 전기불 밝은 아늑한 잠자리에서 쉬고 나면 이제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마지막 코스로 그레이 빙하를 마주하고 빙하 투어 보트를 타고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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