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2017/8/5(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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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31(#산티아고 30일)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 20170531(#산티아고 30일)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쪼 - 베가 데 발카르스 :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까미노의 또 다른 이정표인 용서의 문을 지나 오늘도 아침 여명을 보며 새 길을 걷습니다.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요.
난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점심 도시락까지 싸서 한결이를 기다립니다.
5시반에 한결이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거즈를 다 갈아 주구요.
그리고 아침상을 차리고 기다리는데 한결이는 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결국 오늘도 7시가 넘어 출발합니다.
난 그냥 속이 타지만 함께하는 길인데 어쩌겠어요.
이렇게 내가 도를 닦습니다.ㅎ

오늘 출발하며 내 초점을 다시 잡습니다.
화 안내고 말하기, 친절하고 자상하고 부드럽게 대하기입니다.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요.ㅎ
어제 밤의 꿈이 깨고 나서도 생생합니다.
꿈에 박근혜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주 자상하게 삶의 원리를 이야기해주고 성경을 풀어 주었고 그녀는 우주의 기운을 받듯이 감동적인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었지요.
그러다 잠이 깨니 내가 뭐하고 있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뿌듯했지요.
아마 어제 저녁을 준비하는데 옆에서 코리안과 제페니즈들 음식 준비하는게 지저분하고 어쩌구 쩌쩌구 하는 소리를 듣고 불끈했던 것이 의식에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화가 나서 너 어느 나라에서 왔냐, 니들은 얼마나 고상한 문화에서 살기에 순례길에 와서도 그리 무례하냐, 넌 순례자도 아닌 편협한 어글리다 라고 몰아붙이려다가 참았지요.

숨을 내리면서 인내와 평화에 대해 생각했더랬습니다.
그게 의식에 남아 감옥에 있는 박근혜 아줌마가 꿈에 나왔나 봅니다.
돌아보니 참기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초점을 친절과 인내로 삼습니다.
평화를 일구고 공손하고 다정한 태도로 나를 가꾸어 가기로요.
똑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력이지요.
나도 몸이 아프니 짜증이 올라오고 있는데 다시 제로 베이스로 돌아가 일단 정지하고 몸과 마음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아내가 많이 아플 때 모든 일이 다 내게 몰리면서 본의 아니게 일에 쫓겨 짜증스러운 말투가 나오니 아내가 화내면 무섭다고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더 잘하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던 말과 표정이 이럴 때면 더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더 많이 미안합니다.
더 이상 그런 실수를 말아야지요.

그런데 오늘 한결이 컨디션이 영 이상합니다.
아침에도 늦장을 부리더니 걷는 것도 기운이 없습니다.
어제는 날아갈듯 나를 앞서 걸었는데요.
와서 하는 말이 어제는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모르겠답니다.
걷다가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고 화장실을 자주 찾더니 물같은 설사를 계속한다구요.
아이구, 설사까지요.ㅠ
오늘 높은 산인 오 세브리로까지 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15Km 정도를 걷고 산 아래 서비스 시설이 좋은 '베가 데 발카르스'에서 멈추고 한결이가 검색한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로 되어 있는 'Albergue the Magdalena'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곳 공립 알베르게 100m쯤 전 오른편에 있는 알베르게입니다.
9유로 벙크 베드에 2인실도 26유로를 하고 주인장이 아주 친절하면서 주방과 샤워 시설도 소박하지만 잘 되어 있습니다.
머물러 재충전하기 좋은 알베르게입니다.
이틀 공립 알베르게에서 있었으니 하루 쉬고 힘내어 내일 산을 넘어 많이 걷기로 합니다.
참, 오늘 알베르게 등록을 하면서 한결이가 아들이라니 친절한 주인장 내외가 '오 마이 갓'이라고 외마디를 지릅니다.
절대 아니라구요.
브라더나 프렌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알베르게가 좋다고 추천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ㅋ

그렇게 오늘 친절하고 자상하게 숨을 내리며 길을 걷다가 만나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길에서 멈추어 에스프레소를 한잔하며 문득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순간이 좋다'가 올라옵니다.
지금 내가 오롯이 걷는 것만 할 수 있다니요!
걷는 순간도 쉬는 순간도 내가 스페인 하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그럴 때는 비와도 좋고 바람이 불어도 좋고 다투어도 좋고 다정해도 좋습니다.
그게 내게 주어진 삶이니 말입니다.
삶이라는 순례길에도 그렇게 서는 거라는 새로운 느낌이 찾아옵니다.
그저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 순간을 누리며 정성을 다합니다.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다 좋습니다.'
그렇게 지금 쉬었다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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