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산의 길 위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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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앨범입니다.
이름: 깊은산 (eastsain@chollian.net)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7/7/30(일)
20170527_073502.jpg (137KB, DN:8)
20170527(#산티아고 26일) 복병  
● 20170527(#산티아고 26일) 산티바네츠 데 발데이그레시아스 - 산타 까탈리나 데 소모짜 : 복병



어제는 종일 천둥번개와 함께 비님이 내리시더니 저녁이 되어서 하늘이 개이고 햇살이 비추었지요.
삶은 늘 기대와는 다르게 이어집니다.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하며 오늘 마음의 날씨가 어떠했냐고 물으니 한결이 왈, 밖에 비가 왔으니 마음에도 비가 내렸다구요.
어이가 없어서 비가 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이냐고 하니 느낌을 설명할 수 있으면 세상에 전쟁이 없을 거랍니다.
또 한 방 먹었습니다.
한결이가 그냥 나를 쥐었다 놓았다 합니다.
오늘 날씨처럼 말이죠.ㅎ

이 마을 알베르게 역시 한가했습니다.
레온에서 나온 그 많은 순례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가우디궁이 있는 아스트로가가 10여Km 남아 그리로 다 갔나 봅니다.
너무 여유가 있어 한결이 낮잠을 자는 동안 영화 한편을 다 보았습니다.
쉼이라는 순례를 어떻게 채워갈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네요.
잘 쉬고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지나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를 저절로 합니다.ㅎ
한결이를 깨워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하니 길에서 여명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아침의 향기를 맡습니다.
컨디션이 좋게 쉬지도 않고 단숨에 8Km를 한 시간 반 만에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해서 한결이는 스페인 오믈렛인 또띠아로 아침을 하고 나는 미숫가루와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행복을 만끽하지요.

눈 앞 언덕에 손에 잡힐듯한 아스트로가로 한걸음씩 걸어갑니다.
오늘 복병은 이 아스트로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이곳에는 대성당과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주교궁이 있습니다.
걷기 바빴던 지난 순례길에도 나는 한 나절을 가우디 궁과 대성당을 둘러보며 보내었지요.
그래서 몇 번이나 한결이게 가우디궁과 대성당은 둘러보기를 권했는데 오늘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는데 돈과 시간을 쓰기 싫다고 더 고집을 부립니다.

그냥 그런 한결이의 말을 들어주면 되었을텐데 나도 화가 올라왔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려고 가우디궁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경험하고 순례길을 알차게 하고 싶어서인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한결이에게 화가 났습니다.
화의 방향이 잘못되었지요.
난 화를 내색하지 않으며 말한다고 했는데 그게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지요.
싫다고 하는 한결이에게 그럼 좋은게 뭐냐고 몰아 부쳤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거 많답니다.
내 참,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은 게 없다는 거라고 그럴려면 왜 순례길을 왔냐고 해버렸습니다.
한결이도 화가 나 입을 다물어 버리구요.
그리고 우리는 단숨에 가우디궁이고 대성당이고 그냥 휙 지나쳐 사진도 찍지 않고 아스트로가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결국 가우디궁과 대성당을 안내하려다가 아스트로가를 통째로 놓쳐버렸네요.
손해 봐도 이만저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닙니다.
삶이 이렇고 내 수가 이리도 낮습니다.
진짜 만나야할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바깥의 환경이 내 적이 아니라 적은 안에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씨나 발의 물집이나 봉와직염이 우리의 순례길의 걸림돌이 아닌 거지요.
그럴 때는 서로를 위로하고 아끼고 의지했는데 바깥의 장애물이 사라져가니 내 안의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참 어이가 없고 부끄럽습니다.
롯과 다투던 아브라함이 다시 떠오르지요.

오늘 다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제로 베이스로 돌아갈 순간이 어디인지를 다시 살피게 됩니다.
삶의 길에서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동전의 앞과 뒤입니다.
한결이가 자고 나면 사과를 하고 또 내 마음을 잘 전해야겠습니다.
한결이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한결이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났었다구요.
그리고 한결이가 싫다고 하는 것을 잘 듣지 못하고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구요.
삶의 가장 큰 실력은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고 하겠습니다.
내 수련장, 나의 순례길입니다.
한참을 바람부는 들판에 앉아 있었습니다.
명상을 하며 숨을 내리니 다시 보여지는 것이 있고 찾아오는 평화와 위로가 있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쉼은 이렇습니다.

내일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또 다른 이정표인 철십자가가 있는 산 아래 '라바날 데 까미노'라는 마을을 지납니다.
그 산 위의 십자가는 나를 내려놓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 마을에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데 한국인 신부님이 한국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순례자 숙소를 운영하며 순례 중 수도원 경험을 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루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틀 이상을 묵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쁘게 걷는 순례길에 일단 정지를 하게 하지요.
물론 인원에 제한이 있고 예약도 되지 않습니다.
먼저 온 순례자가 나가야 들어갈 수 있는 거지요.
우리 일정이 바쁘고 수도원 생활에 한결이가 부담스러워해 더 역효과가 날까 두렵기도 합니다.
아스트로가처럼 안내를 하지 않은만 못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한결이는 일정을 보며 내일 여기서 10여Km 떨어진 라바날에 오전에 일찍 도착해 하루라도 머물어 아버지라도 수도원을 둘러 보라고 합니다.
자기도 아스트로가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내일 일정은 오늘 밤 조율을 더하고 조금 상황을 다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뜻밖의 복병을 만나 참 마음이 어둡고 또 그래서 많이 배운 날입니다.
이렇게 바람이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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