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20170510(#산티아고 9일) 미안해요. (art

깊은산의 길 위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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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앨범입니다.

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2017/7/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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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산티아고 9일) 미안해요.

● 20170510(#산티아고 9일) 토레스 델 리오 - 로그르뇨 : 미안해요.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오고 있습니다.
와이파이도 느려서 전날 올린 사진이 올라가지 않고 있었구요.
날씨를 살펴보니 8시 즈음부터는 비가 멈춥니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직 어둑한 길을 판쵸 우의를 둘러쓰고 길을 떠나는데 한결이에게 조금 더 자라고 하고 천천히 준비를 합니다.

어제 디너는 좋았습니다.^^
센스 있는 레스토랑 메니저의 배려로 한국 순례자 8명이 한 상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나오는 디너를 느긋이 즐겼네요.
여기는 밥을 2시간은 먹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상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왁자지껄 파티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말을 먹습니다.ㅋ
한국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지요.
그래도 서빙 된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보낸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6살, 초등학교 1학년, 4학년 아들 셋을 데리고 온 엄마 아빠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10Km씩 천천히 걷는데 운 좋게 만났네요.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순례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한결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이들과 놀아 줍니다.
그렇게 함께 하는 자리, 동병상련, 그 자리에 있어 본 사람들만이 통하는 무엇이 있지요.
모자에 있는 세월호 뺏지와 팔목의 노란 팔찌를 보며 아빠는 나보고 송구하고 미안하다고 합니다.
외국에 살면서 이리 기억해주니 마음이 참 좋다구요.
그 한 마음만으로도 서로 백년 지기는 된 것 같습니다.
언제 다시 연락이 닿을 줄 알지 못하지만 그 밤의 순간을 만끽합니다.
볕에 그을린 검은 얼굴의 순례자들이 그렇게 함께 밤을 맞고 보냈지요.

어제 일찍 멈춘 길이 아쉬운지 한결이는 아침부터 씩씩하게 힘을 내어 걷습니다.
바이아나까지 10Km, 그리고 대도시 로그로뇨까지 다시 12Km입니다.
욕심 같아선 14Km를 더 걸어 나바라떼까지 가고 싶지만 한결이 컨디션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한결이 발이 많이 부어서 한 걸음 걷는 것도 힘겨워하네요.
바이아나까지는 잘 걸어 힘차게 로그로뇨로 가는데 길이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힘이 드니 신경질을 내고 또 그런 자기가 밉고... 그런 내면의 갈등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평소에는 그런 아들이 보기 싫어 윽박질렀을 내 모습도 보입니다.
길에 함께 서 있으니 한결이와 만나는 내 모습이 다시 보이는 거지요.
역지사지가 저절로 되고 안타까움에 그저 기다려 주고 토닥여줄 밖에요.

도시에 다 와서 알베르게를 찾는데 낯선 도시에서 길 찾기가 쉬울 리가 없습니다.
다리를 절며 몇 바퀴를 도는데 한결이의 짜증이 폭발합니다.
그래도 잠잠히 길을 이끌어 원하는 알베르게를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다시 미안한 미소입니다.
한결이가 쉬어야해 도미토리 룸이 아닌 더블 룸 알베르게를 구했습니다.
로그로뇨에 그런 알베르게가 있네요.
욕실 딸린 더블 룸이 30유로이니 주방을 활용해 밥을 해먹으면 더 절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후 3시에 알베르게에 들어 좀 쉬고 나면 한결이도 한 단계 넘어서겠지요.
순례길, 아픈 다리를 만나고 한계를 마주하며 길이 주는 지혜와 변화를 스스로 찾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신경질 내는 거는 뭐 좋습니다.ㅎ

오면서 어제 삶을 만나는 요령에 이어서 의식 수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 우연은 없고, 이 문제의 좋은 점을 찾자고 했지요
우리가 수련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하나입니다.
의식 수준을 높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행복하려구요.
의식이 낮으면 같은 일에도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의식 수준이 올라가면 감사와 찬미지요.
그 요령은 첫째로, 이유 없이 웃어주기입니다.
웃으면 기운이 달라집니다.
둘째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하기입니다.
대가를 바라니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순례길도 마찬가지지요.
걸었으니 어디쯤 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바램과 대가의 요구가 그렇습니다.
셋째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사랑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까미노에 들어섰으니 걷는 것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일에 정성을 다하는 거지요.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삽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니 하루이지요.
밤이 없이 아침을 맞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옆에서 한결이는 코를 골면서 자고 있습니다.
오후 4시에요.
아들과 단 둘이 낯선 스페인 도시에서 나란히 침대를 쓰고 있네요.
일상에서는 집에 와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 투명인간이 서로인데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함께 길 위에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친구들도 그럽니다.
아이들이 아빠와 말도 섞으려 하지 않는데 그렇게 함께 순례길에 있다니 대단하다구요.
맞습니다.
근데 해 보세요
무지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ㅋ

한결이를 깨워 장을 봐 저녁을 해 먹으려 하니 일어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장을 봐올까 했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안해요 라고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참 안쓰럽습니다.
쵸리또(스페인 소세지), 하몽(스페인 햄), 야채 볶음에 냄비 밥을 해 올리니 잘 먹습니다.
옆에서 일본 친구가 한결이에게 어떻게 까미노에 왔냐고 하니 내 쪽으로 고개 짓합니다.
참 내.ㅎ
이렇게 로그르뇨의 밤이 깊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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