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산의 길 위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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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앨범입니다.
이름: 깊은산 (eastsain@gmail.com)
홈페이지: http://sanmul.net
2018/6/16(토)
20151112_212234.jpg (212KB, DN:10)
20151112 떼제 공동체 다섯째날  


● 20151112 떼제 다섯째날

이틀째 안개가 가득한 떼제입니다.
구름 속의 떼제 언덕이지요.
이제 멀리 산 중턱에 걸린 구름과 햇살이 보입니다.

여기선 일상이 참 느립니다.
평소보다 잠을 2배는 더 자는 것 같습니다.
밖에 나오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데 이곳에선 누우면 잠이 드니 이렇게 편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나 봅니다.
꿈도 많이 꿉니다.
언어의 불편함도 어느새 익숙해졌고 오히려 침묵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구요.
충분히 자고 마음, 표정을 알아차리며 느리게 일어나 준비된 기도회에 참여 하고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전에는 성경 묵상을 하고 오후에는 낮잠을 자거나 산책을 합니다.
중간 중간에 해바라기를 하며 언덕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글도 쓰고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와 명상에도 잠기지요.
그리고 머무는 내내 가족과 친구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한 기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상을 떠나 이렇게 기도만 할 수도 있네요.
세상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오늘은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프랑스인 친구가 따라오며 내가 명상하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다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삭발하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니 특별해 보였나 봅니다.
목사라고 했더니 그러냐고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합니다.
꼼짝하지 않고 앉았으니 곧 공중부양이라도 할 듯이 보인 건가요?

용서에 대한 물음이 찾아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했는데 어떻게 할까 묻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고 엎드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지요.
그리고 나서 나이가 많은 자로부터 적은 자까지 다 물러가고 나자 예수는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죄를 짓지 말라도 하셨지요.

10년 전 떼제의 원장 로제 수사가 이곳에서 저녁 기도회 중에 정신병을 앓는 여자에게 칼에 찔려 살해 당했습니다.
그 때 일어난 공동체의 놀라움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떼제는 원장을 살해한 여자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합니다.
떼제가 용서를 배우는 시간이었지요.

함께 본문을 묵상하고 소그룹으로 나누는데 스위스에서 온 여자분이 자기는 용서를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만일 내 아이나 가족이 살해를 당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것같다구요.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다시 해묵은 용서에 대한 물음들을 묻습니다.
과연 어떻게 용서가 가능한 것이고 예수에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 역시 아내의 죽음 앞에 하나님조차 용서할 수가 없었던 적이 있지요.
아니 내 스스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6년도 더 지난 일인데 다시 떠올리니 그간 내가 어떻게 살았나 싶습니다.
징하고 징한 시간을 잘 넘어왔다 싶은데 툭 건드리면 터져 버리는 아픔과 한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살아날 길이 없었지요.
하나님을 용서한다고 하니 어감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예"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길이 없는거지요.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툭!하고 떨어진 것이 나를 움직이는 신비가 아닐까 합니다.

간음하다 예수 앞에 잡혀온 여자의 이야기에는 여러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첫째 포인트는 왜 여자만 잡혀 왔을까? 이지요.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잡아왔지만 남자를 잡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동네 남자들이 다 공범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죄 없는 자가 없고 그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거지요.
이는 시스템의 문제이고 구조적인 죄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러니 그 여자를 정죄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시시비비가 이런 범주에 있고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려고 여자를 잡아왔듯이 도리어 힘없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괴롭히고 제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포인트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가 얼마나 상대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간음하거나 살인한 것을 정죄하지만 예수는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마다 다 간음한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으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의 세계에서는 애초부터 정죄니 용서니 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는 여인의 죄와 그 여인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는 않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지요.
용서가 있다면 그렇게 떨어져 볼 때 나오는 것입니다.
여인을 간음한 행위와 구분할 수 있을 때, 여인을 여인으로 볼 수 있을 때 용서가 찾아옵니다.
나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나의 존재와 나의 행동은 다르지요.
물론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겠지만 그 책임 이전에 나의 존재를 볼 수 있을 때 용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떼제는 여기서 나는 오늘 어떤 자리에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가 되어보고 고발자가 되어보고 잡혀온 여자가 되어 봅니다.
그 때 일어나는 시방 느낌이 있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은 내 의식 수준의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모든 것이 문제이고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서 나와 믿음에 이르러 있을 때 용서가 일어나지요.
감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 세 자리에 서 있곤 합니다.
고발자가 되어 사람들을 정죄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큰 죄를 짓고 끌려와 돌에 맞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세상의 모함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 때 분명한 것은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용서의 전제에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 책임을 지고 나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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